"너나 잘하세요"

금자씨(이영애)가 출소하면서 무표정하게 처음 내뱉는 이 말은 복수 삼부작의 최종 결론이자 박찬욱 잔혹극의 윤리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금자씨가 13년 만에 감옥 문을 나서자마자 마주하는 건 그의 구원을 애타게 고대하던 전도사(김병옥)다. 금자씨는 신의 심부름꾼이 내민,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는 상징인 두부를 거부하며 싸늘하게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나는 나대로 잘할게요 이 말 앞 혹은 뒤에는 당연히 이 말이 생략돼 있다. “나는 나대로 잘할게요.” 나의 구원은 신조차 해결할 수 없는 나의 문제인 것이다. 회피하든 돌파하든 어김없이 조여오는 비극적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할 것이냐는 건 결국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시스템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신의 종(전도사)은 순수 악(백 선생-최민식)과 모종의 거래를 트며, 수사기관(최 반장-남일우)은 진범을 체포할 능력을 상실했고 나아가 금자씨가 진범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감옥으로 보낸다. 또 국가가 관장하는 감옥 안의 질서는 정글이다. 교도관의 존재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감옥의 주인은 금자씨의 친구이거나 사라져주어야 할 폭군이다. 복수를 대신해야 할 재판이라는 심판 기구는 인민재판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을 만큼 무기력하다고 피해자들은 만장일치를 본다. 새삼스러운 건 아니다. <복수는 나의 것>의 동진(송강호),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를 지원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하는 연인조차. 그러니 금자씨가 신과 우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할 만하다. 이런 점에서 금자씨가 전도사가 내민 두부를 거절하고 자신이 직접 만든 두부 모양의 케이크에 얼굴을 박는 건 참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이다.

딜레마는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친절한 금자씨>의 곳곳에 흐르는 비발디의 바로크 선율이 암시하는 것. 바로크 비극은 페허와 죽음을 향한 멜랑콜리다. 육신의 죽음은 부활로 새 생명을 얻으리라 확신하고 죽음을 예찬할 수 있었던 중세의 믿음이 종결되면서 찾아온 사조. 사람들은 해골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허약한 결말이며, 해골은 그냥 해골로 끝난다는 걸 알아버렸다. 바로크 비극은 바로 그 체념의 멜랑콜리를 노래했다. 나만 잘한다고 해서 나의 최종 심급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찬욱은 거듭 말한다. “최후의 선택인 복수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다만 그 구원을 향한 수고에 아름다움이 있고 희망이 있다.” 음악이 아니더라도 <친절한 금자씨>는 바로크 비극의 테두리 안에 있다.

그럼 구원 따위는 애초부터 기대하지말고 체념한 채 나만 잘하자? 여기서 금자씨는 <복수는…>의 동진이나 <올드보이>의 오대수보다 ‘진화’된 윤리학을 보여준다. 금자씨 이전까지 박찬욱의 과잉된 스타일은(그게 미니멀하든 화려하든) 영화 전체에 뿌려져 있었지 개인에게까지 닿아 있지 않았다. 동진은 머리든 옷이든 말투든 뭐든 자기 스타일을 돌아볼 여력이 없었다. 오대수는 그래도 낫다. 그는 (성나서 그랬겠지만) 사자머리에다 선글라스를 쓰고 복수를 스타일화한다. 게다가 복수극과 뒤엉킨 것이긴 해도 섹스까지 즐긴다.

무조건 예쁜 게 좋아

금자씨에 이르면 영화만큼이나 자신의 스타일이 중요해진다. 시대에 좀 뒤처진 듯해도 자신과 잘 어울리는 물방울 무늬와 꽃무늬 원피스를 즐겨입고, 알랭 미클리 선글라스를 벗으면 채도 높은 빨간색 아이섀도가 그의 눈을 장식하며 심벌로 작동한다. “힐은 없니?”라거나 복수의 흉기가 될 총의 제작을 주문하면서는 “예뻐야 돼. 무조건 예쁜 게 좋아”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말로 자기 스타일을 드러내는 경우는 삼부작 중 처음이다. 복수의 처단식장에선 검은색 가죽 롱코트로 서구적 여전사의 풍모마저 내비친다. 또 그의 손끝에선 총알이 튕겨져나가 귀여운 강아지의 숨을 끊어놓기도 하지만 맛이나 모양에서 예술품에 가까운 케이크를 빚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섹스. 오대수의 그것과 달리 금자씨는 복수극과 무관하게 섹스를 이끈다. 금자씨는 끝내 영혼을 구원받지 못했다고 슬퍼하지만 낙차 큰 연하의 꽃미남 애인과 어여쁘고 야무진 딸을 그의 곁에 남겼다. 죄의식을 개운하게 털어내지는 못했지만 금자씨는 이들과 더불어 예쁜 여생을 보냈을 것 같다. 그래서 금자씨의 윤리학 앞에 미(美)란 단어를 추가할 만하다. 미적 윤리학. 미적 윤리학이 그나마 그를 살 만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미적 윤리학이 스타일에 국한된 건 아니다. 앞선 두편의 복수극과 달리 <친절한 금자씨>의 가장 큰 비밀이자 승부수인 마지막 3분의 1 대목에서 금자씨는 타인에게 진정한 친절을 베푼다. 생의 유일한 동력처럼 남았던 복수의 제의, 즉 백 선생 처단식을 남에게 선뜻 양보한다. 금자씨의 미적 윤리학이 말하는 최후 진술이자 바로크 비극의 교훈은 이렇게 수정된다. “너나 잘하세요. 좀 아름답게.”

그리고 폭력은 계속된다

아무리 미적 윤리학이라 해도 이것으로 <친절한 금자씨>를 충분히 만끽할 순 없다. 복수 삼부작은 폭력적이다. 그 이미지들은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곳곳에 뿌려져 있다. <복수는…>에서 류(신하균)가 장기밀매업자의 경동맥을 찔러 분수처럼 피를 뿜어내게 하거나 복수한 신체를 씹어먹는 직접적인 이미지도 그렇거니와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으로 헉헉거리는 류의 누나가 뱉어내는 신음을 정사의 교성으로 착각하는 청춘들을 보여주는 상황의 아이러니도 폭력적이다. <올드보이>에선 오대수의 몸 자체가 폭력의 포획물이다. 15년간 사적으로 감금당하고, 계획된 스케줄대로 정사를 나누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박찬욱 감독이 신체를 다루는 방식에서 ‘폭력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떠오르는 건 이상하지 않다. “고통받는 모든 인간은 고기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이고 그 둘 사이를 구분할 수 없는 영역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화사하고 서정적이긴 하지만 폭력을 포기하진 않는다. 사실, 길고 긴 처단식이야말로 삼부작 중에서 가장 끔찍스런 기억으로 남을 만하다. 특히 그 가운데 제시되는 아이 처형 장면은 눈의 호흡을 멈추지 않고는 볼 수 없는 순간이다. 그토록 사랑스런 금자씨에게조차 복수가 당신을 구원하는 건 아니라고 모범답안을 제시하면서, 그 지극히 윤리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이며 파괴적인 이미지를 나열해야만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냥 악취미?

(cine21, 이성욱)

※ 친절한 금자씨를 봤다.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감독 중 하나이며, 최고의 스타일리스트인 박찬욱 감독의 작품으로 그의 전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를 잇는 복수 3부작의 완결편으로서 매스컴과 평단, 관객의 궁금증을 한번에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에대한 감독의 부담감도 상당했음은 힘들여 예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영화가 개봉되고 제목에 빗대어 부담스런 찬욱씨라는 조크가 나왔겠냐.. 하지만 찬욱씨의 부담감은 대체적인 평단의 극찬과 관객의 만족감, 개봉 초부터 질주하는 흥행성적으로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고 생각한다.

금자씨에 앞서 복수의 3부작에서 '복수는 나의 것'이 돈에 의한 복수, '올드보이'가 말에 의한 복수 라면 '친절한 금자씨'의 경우 모성에 의한 복수라고 할 수 있으며, '복수는 나의 것'이 차가운 현실과 가까웠다면, '올드보이'는 뜨거운 환상이, '친절한 금자씨에' 와서는 다시 정제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영화였다. 재미있는 것은 복수라는 행위의 측면에서 비교해 보면 복수는 나의 것의 송강호가 얼마나 큰 죄악인줄 알면서도 숙명 처럼 복수를 저지른다면, '올드보이'의 최민식은 멋모르고 저지른 잘못 때문에 까닭모를 고통을 겪고, 그에 대한 복수를 행하고, 금자씨의 이영애는 죄에 대한 속죄의 행위로서, 죄의식이 없는 자에 대한 응징의 수단으로서 복수를 선택한다.

이러한 일련의 복수라는 모티브를 통해 감독은 마치 총체적 선인도 총체적 악인도 없지만 선악은 분명이 있다고 말하는 듯 하고,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의 상황에 항상 처하는 현대인은 아주 사소한 경우에도 도덕적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어떠한 행위로도 구원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또한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래야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감독의 말처럼 잔혹함과 지독함을 통해 원론적인 교훈(죄를 짓지 말자, 복수하지 말자)을 관객들에게 절실하고(?) 뼈저리게(?) 강요하는 듯 하다.

다시 금자씨로 돌아가서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박찬욱은 최고의 미쟝센을 보여주는 장인답게 영화 곳곳에 초현실적인 분위기, 키치적인 요소, 만화적인 요소를 적당히 버무려 놓았으며, 세트의 색공간에도 대단한 공을 들여 내러티브와 공간이 때로는 보완이 되도록 때로는 서로 배치되게 구성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부조리함에 대한 인식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또한 철학을 전공한 감독답게 영화는 전후반의 소재와 인물의 심리를 각각 대응시켜 논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력적인 화면과 화려한 스타일과는 달리 정작 영화의 줄거리는 전작에 비해 범작에 지나지 않았나 싶다. 영화 속에 두 가지 이야기가 존재하길 원했다는 감독의 인터뷰처럼 영화는 전반부에는 금자를 중심으로 중후반에는 피해자 가족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전반부가 금자의 복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부에는 집단의 복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감독은 개인의 복수와 집단간의 복수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개인의 심리와 집단의 반응이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결과는 오히려 한가지 얘기만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실망만이 남을 뿐이었다.

배우에 있어서도 대기업 화장품, 전자제품 모델인 이영애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뛰어난 변신을 이루어 내었으나 이영애의 기존 이미지를 모두 덜어내는 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화의 복수의 모티브가 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영애란 배우에게서 모성을 느끼기에는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으며, 너무나 예쁜 얼굴로 인해 미묘한 표정의 연기조차도 배우의 재기를 느꼈을뿐 깊이감을 얻어내는데는 실패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봄날은 간다에서의 이영애의 연기가 좋았다)

아무튼 이러한 단점들로 인해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 3부작의 연착륙은 될지언정 수작이 되기에는 힘든 작품이 아닐까 싶다. 또한 박찬욱이라는 감독에 대해서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일지는 몰라도 뛰어난 이야기꾼은 아니라는 의심을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겠는가? 박찬욱은 이미 비평의 목소리쯤은 간단히 제압할 만한 거장의 반열에 올라가 버렸으니…

작품성 : ★★☆

흥행성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