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샤우덱(Jan Saudek)는 1935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현재 70대를 바라보는 노작가 이면서, ‘포르노그래퍼’로 불리는 도발적인 일련의 누드사진들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사진의 매력은 누드사진의 경계와  ‘포르노그래피’의 경계, 그리고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우 독특한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테면, 흑백사진에 위에 채색을 해서 회화 작품처럼 보인다든가, 누드의 문맥과 포르노그래피의 문맥 사이 중간지대에서 제작된 듯한 사진들 연작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인간의 몸은 아름답지 않은 비정상적인 추한 모습들이다.

누드사진하면 떠오르는 연상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을 생각한다. 그만큼 사진에서 여인의 몸은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늘 사진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물론 최근에 남성의 신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누드사진하면, 관능적인 여성의 몸매를 떠오르는 것은 필자가 구지 남성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여성의 몸은 성적 욕망의 대리 물로서 그 이미지는 넘쳐나고 있다. 남성에 비해서 여성의 몸을 찍은 사진이 수적으로 압도적 우의에 있는 것이 주요한 요인이겠지만, 누드사진 하면, 여성 하는 식으로 연상되는 것은 오랜 역사적인 전통과 인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신화에서부터 ‘미’의 신은 언제나 여성이었던 것처럼 여성은 곧 ‘미’의 표상으로서 미술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편, 고대 조각성은 대부분이 남성의 신체를 다루고 있는데 이 또한 완벽한 신체를 시각화함으로서 그들의 이상을 구현하려 했던 것이다. 즉, 최근미술에 등장하는 실존적이고, 불안한 신체는 절대미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샤우덱의 사진들은 우울하고 침침한, 마치 역사의 유물과 신화를 대하는 듯한 인상과 함께, 불안한 인간의 ‘몸’이 노출되어 있다. 포르노그래피에서나 등장 할법한 직접적인 성행위 장면도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보다는 불안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사진 찍은 인물들은 주로가족들, 친구, 이웃, 연인들에 한정되어 있다. 가난한 그로서는 비용을 지불하고 전문모델을 구할 수도 없었겠지만 가족이나, 친구, 이웃만큼 자신의 감정을 이해주고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피사체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촬영 장소를 항상 좁은 공간인 자신의 집 지하실로 한정했다. 그것도 잘 차려진 스튜디오처럼 흰색이나 회색으로 밝게 칠한 벽이 아닌 낡고 곰팡이가 나서 얼룩진 벽을 그대로 배경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의 지하 작업실 분위기는, “습하고 축축하여 바닥에 깐 마루위에 깔아 놓은 매트리스까지 곰팡이가 슬었고, 침대 시트는 물론 그 위에 덮인 담요에까지 곰팡내가 스며들고, 옷, 책, 필름, 심지어 비누까지도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고 했다.

아마도 그의 사진의 방향이 결정된 원인은 이와 같은 환경과, 유태인의 아들로 근대사의 격동기에 항상 피지배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출생하여 성장했다 는 점이다. 때문에 그의 사진이 다소 초현실적인 환상의 분이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음울하고, 불안한분위기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성장 과정을 보면 1939년에 나치가 자신의 나라를 점령하자 은행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유태인이었기에 프라하 거리의 청소부로 전락해 버렸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강제 수용소 생활을 했다. 또한 그의 삼촌들은 그 수용소에서 모두 살해당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캐어 먹는 빈곤 속에 허덕였다. 1945년에는 다시 소련 병사들 군화에 짓밟히는 핍박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아래서 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쇄소의 사진사 조수로 들어갔다.

바로 이 일이 그가 사진작가의 길을 걷는 밑거름이 되었다. 조수로서 도제 수업이 끝난 후 사진사 자격증을 얻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1952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코닥카메라를 손에 넣게 되어 줄곧 이 카메라로 작업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사진작가가 되려고 결심한 시기는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했을 때 친구가 보여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기획한 작품집 〈인간가족 The Fammily of Man〉을 본 후였다고 한다.

샤우덱는 이 사진집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으며 감격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는 사진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을 걸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 영감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라이프 Life>지이다.

이 잡지에 게재되었던 지셀 프로인드(GiseleFreund), 마가레트 버크화이트(Margaret Bourke-White), 유진 스미스(Eugene Smith)등의 사진에 매료되어 인본주의에 입각한 기록사진을 많이 촬영했다. 그의 사진의 주제가 인간 실존의 본능적인 욕망에 관한 것들 (육체, 잉태, 죽음, 성)이 대부분인 것은 바로 이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샤우덱이 인간의 존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전통적인 누드의 어법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도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지 않는다. 마치 밀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뚱뚱하고, 비정상적인 몸의 뒤틀림이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다. 그야말로 성적인 자극이 무시된 형상이다.

흔히 포르노 그래픽의 특징은 남성관객을 대상으로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성행위를 등장 시킨다. 그에 비해서 샤우덱의 사진들은 직접적인 성행위조차도 성적흥분이 일어나기 보다는 불편한 심정을 불러일으킨다.

샤우덱이 인간의 존재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전통적인 누드의 어법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도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인들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지 않는다. 마치 밀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뚱뚱하고, 비정상적인 몸의 뒤틀림이 있는 기형적인 모습이다. 그야말로 성적인 자극이 무시된 형상이다.

그 동안 누드사진은 예술시비논쟁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회화 보다는 직접적인 사실성이 강한 사진작품이 더 큰 문제였다. 늘 똑 같이 벌거벗은 신체를 다루고 있어도 사진으로 찍혀진 것과 그림으로 그려진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이가 있었다. 사진 내부에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누드사진이라 불리는 형식은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지만, 포르노그래피형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누드예술은 고대로부터 인간의 완전한 신체의‘미’를 표현하는 이상화된 ‘미’를 구연하는 것이고, 세속적인 성적욕망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그러니 벌거벗은 인간의 몸이 그대로 노출되는 사진은 늘 의혹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회화와 비교해 사진의 제한된 표현은 어절 수 없는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연히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술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회화의 주제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하고, 때로는 회화처럼 보이기를 스스로 자처하기도 했다. 모더니즘 사진은 바로 회화적 경향의 사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사진의 독자적인 미학을 구축하고자, 사실적인 묘사로 소위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픽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 이 와중에 누드사진은 신체의 형태미를 보여준다든가, 이상적인 신체미를 구현하려 했다. 어딘가 엄숙하고 숭고한 미를 느끼기에 충분한 사진들 말이다.

그에 비해서 샤우덱의 사진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누드사진들과 거리가 멀고 오히려 포르노 그래픽사진들을 모방하고 있다. 그의 사진은 많은 부분이 경박하고 음탕해 보이며 많은 사람에게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반미학적인 분위기로 충만하며, 외설적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매체의 독자성과 순수성을 을 무시한 듯한 기법들 즉, 회화주의 사진처럼 흑백사진위에 색칠을 함으로서 마치 그림처럼 보이게 처리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물론 사진 예술논쟁을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지만, 그의 사진이 포르노 그래픽사진으로 떨어질 위기에서 구재 받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진이 그림처럼 보인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즉, 오랜 동안 습관처럼 각인된 누드예술에서의 회화와 사진과의 외설시비와 예술성의 비교판단의 문제를 그의 사진이 많이 희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단지 예술의 형식상의 차이에서 발생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외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도덕적인 사회적 윤리판단의 문제이다. 인간의 신체와 성은 언제나 감시, 처벌, 억압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사회적인 사건인 것이다.

사진에서 포르노그래피는 이미 사진 발명직후부터 크게 보급 되었다. 예를 들어 스테레오스코프(stereoscope)는 인간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발동시키는 훌륭한 장치였다. 이 기계는 외설스러운 장면을 아주 리얼하게 묘사하는 사진을 혼자만 몰래 감상하는 행위가 가능하도록 했다.

물론 이 때 보는 자는 남성이고, 관찰 당하는 자는 여성이다. 그 내용은 지금의 포르노그래피의 내용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 한다. 직접적인 성행위와 성기의 노출은 물론, 가학적이고, 페티시적이다.

즉, 성적욕망의 표상으로 ‘포르노그래피’를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욕망의 분출을 억압하는 것에 대항하는 탈주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남성중심의 시선이 남성을 보는 주체로 삼고, 여성을 보여 지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증거가 뿌리 깊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인간의 신체를 다룬 미술은 이러한 사고관념을 무너트리는 매우 도발적인 여성의 몸을 표현하는 식의 작품들이 많다.

말하자면, 남성의 주체적인 시선이 머물 자리를 빼앗아 버리거나 뒤바뀌기는 경우 혹은 추하고, 역겨운 인간의 신체가 등장해서 전통적인 누드의 ‘관능미’를 문제 삼기도 한다. 이젠 더 이상 인간의 ‘몸’은 아름다운 신체의 표현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존재론적인 실존의 문제이다.

(필자 미상)

※ 준이 홈피에서 퍼온 Jan Saudek. 그의 사진은 우울했던 그의 유년시절의 기억과 여성에 대한 환상이 잘 녹아들어 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