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년 전 인류는 유목민이었다.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면서 떠돌이로 살았다. 농경이 시작된 뒤 정착민에게 유목은 잊어버린 습성이 됐다. 그러나21세기가 열리면서 인류는 떠돌이의 자유와 불안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노트북과 휴대폰으로 언제 어디서든 외부와 접속하며 이동하고, 일정한 직장과 주소에 얽매이지 않는 ‘디지털 유목민’이 이미 등장했다.

디지털 유목민의 등장은 일찌감치 예견됐다. 30여년 전 미디어 학자 마셜맥루헌은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것이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랑스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21세기는 디지털 장비로 무장하고지구를 떠도는 ‘디지털 노마드(Nomad)’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디지털 노마드가 가장 많이 몰려 드는 곳은 정보기술 (IT) 산업의 메카인미국 실리콘밸리일 수도 있다. 유목민이 오아시스를 찾아 가듯 일감을 찾아 아시아 등 해외에서 몰려 드는 디지털 유목민이 매년 5만여 명에 이른다.

유목, 혹은 유목적(Nomadic) 행동ㆍ의식은 국내에서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카피를 내세운 휴대폰 광고는 신세대의 노마딕한 사랑법에 착안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의 정착ㆍ농경민적 사랑법은 옛날 얘기가 돼 가고 있다.

일상 소비 행태에서도 노마드적 경향은 중요한 흐름을 이루고 있다. 지난해 9월 삼성경제연구소는 소비시장 분석 보고서에서 “자유와 개방, 홀가분하고 쾌적한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족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의 유목 성향이 21세기의 주도적 소비 흐름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 지표로 신용카드 시장의 확대, 패스트푸드와 테이크아웃 음식점의 확산, 휴대폰 판매량의 급증과 부가 서비스 이용 증가, 자동차 운행 중 위치와도로 안내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텔레매틱스 서비스 확대 등을 꼽았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삼성경제연구원 최순화씨는 “가전기기를 비롯한모든 사물을 컴퓨터 네트워크에 연결하는 유비쿼터스 혁명의 도래로 유목적 삶의 방식은 앞으로 더욱 빠르고 강하게 퍼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근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퓨전 레스토랑은 흔히 ‘노매딕 레스토랑’이라고 불린다. 국적이나 특정 문화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을 강조하는 노마드족의 특성에 맞춰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적절히 섞으면서도 각 음식의 고유한 맛을 살린, ‘국적 없는 퓨전’이 아닌 코스모폴리탄 메뉴를 내놓는다.

노마드적 흐름을 보여 주는 이런 현상의 보다 근본적이고 극적인 징표는지난해 월드컵 축구대회 당시 세계적 화제를 부른 ‘붉은악마’, 미군 장갑차 희생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한 ‘노사모’, 최근의 반전시위로까지 이어진 사회적 사건이다. 이들 사건에서낱낱의 점으로 흩어져 있던 개인들이 인터넷을 통해 뜻을 모으고, 일시적으로 거리에 몰려 나와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했다.

노사모는 거대 정당 조직을 능가하는 힘을 보이며 기존 선거 관행을 깨뜨렸다. 중앙집중식 기존 조직과 달리 이들은 흩어져 있다가도 쟁점이 있으면 일시에 거대 조직에 맞먹는 숫자로 모여 들었다. 단순한 투표로 끝나지않고 적극적인 선거운동으로 정치를 정치인과 정당으로부터 일반 시민의몫으로 가져 왔다.

이들의 창조적 파괴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노마디즘’과 상통한다. 주어진 가치체계와 코드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되 거기머물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계속 옮겨 다니는 노마드의 존재ㆍ사유 방식을 닮았다. 의식의 바탕에 깔린 ‘민족’이라는 반(反) 노마드적 요소만빼고 보면 붉은악마 촛불시위, 최근의 반전시위까지도 극히 노마드적이다.

들뢰즈의 노마디즘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학문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연구원 고병권씨는 “노사모는 지역ㆍ성별ㆍ계급에 따라 갈라졌던 기존 정치 공간을 가로질러 다양한 개인이 집결했다는 점에서노마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이 인터넷을 통해 만난 디지털 유목민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흐름”이라고지적했다. 지난해 여름 광장의 붉은악마가 연말의 촛불시위에 참여하고,다시 반전ㆍ평화시위에 합류하는 현상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역과 가치를 찾아 떠나는 노마드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노마드의 핵심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기존 영역을 횡단해 새로운가치를 창조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학교라는 정규교육체계를 떠난 청소년들의 대안공간 ‘하자센터’에서 스스로 공부하고 작업하는 10대들, 이라크로 인간방패가 되어 떠났다가 돌아와 정부의 파병 결정에 항의하며 국적 포기를 선언한 사람들 등도 한국판 노마드라고 할 수있다.

이동_창조_탈주를 거듭하는 들뢰즈식의 노마드 개념에 비춰볼 때 지금 국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노마드는 창조와 탈주보다는 이동, 특히 물리적공간 이동의 자유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그러나 유목민의 자유는 안정된 궤도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결핍을 견디며 홀로 서야 한다는 점에서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유기업원 원장, 벤처기업 CEO를 거쳐 지난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경영연구소를 차리면서 1인 기업가로 독립한 공병호씨. 집에서 혼자 일하며 생필품 구입을 비롯한 일상생활부터 업무까지 모든 일을 휴대폰과 컴퓨터로 처리하는 그는 “1인 기업가의 홀로 서기는 철저한 자기관리가 있어야만 가능한 치열한 싸움”이라며 “순간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단순한 이동의 자유를 넘어 삶과 사유의 지평에서 창조와 탈주를 반복하는노마드의 에너지는 월드컵과 대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젊은 세대를 텃밭으로 이제 막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가져올 변화의 물결은 우리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꿔 놓을 게 분명하다.

(한국일보, 200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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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나라의 호텔 방에서 눈을 뜬 당신. 식당에 내려가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베이글 한 쪽을 입에 물고 열심히 노트북 마우스를 클릭하고 있다. 걸려온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하며 뭔가를 받아 적는다. 당신의 테이블 위에는 갓 배달된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파이낸셜 타임즈’ 가 놓여 있다. 당신은 깨끗하게 손질된 수트와 잘 닦인 구두를 신고 있다. 현대판 노마드, 바로 그들의 모습이다.

혹 당신은 이런 사람은 아닌가. 한 달의 반 이상을 낯선 땅에서 보내고 어디서든 인터넷이 가능한 통신 장비를 지녔으며, 여권은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놓여 있고, 당신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곳에 정주(定住)해 살기를 무엇보다 싫어하고 세속적인 출세와 권력에는 별 관심 없으며, 인터넷만 된다면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즐거워하기까지 한다. 때론 서울에서 뉴욕, 뉴욕에서 런던, 런던에서 취리히로 하루가 멀다하고 옮겨다닌다.

만약 이런 범주에 하나라도 속한다면 당신은 현대판 노마드(Nomad:유목민) 족으로 명명될 만하다. 싱싱한 풀을 찾아 늘 거주지를 옮겨다녔던 유목민들은 일이 있고 잠잘 곳만 마련된다면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곤 했다. 노마드란 그리스어 nomas에서 유래되었다. 노마스는 ‘몫을 나눈다’는 nemein과 ‘할당된 곳을 떠돈다’는 as의 합성어다. 그 어원에서 보듯, 노마드는 신이 할당해준 자연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사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한때 바람처럼 휘몰아쳤던 ‘보보스’ 의 개념에는 방랑자적인 보헤미안 기질을 지닌, 돈 많은 부르주아지의 낭만성이 담겨 있었다. 보보스에 이어 등장한 노마드 족은 인터넷의 바다를 항해하며 사는 현대인들의 특징적인 모습을 새롭게 해석하고 나섰다. 단순히 보헤미안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삶을 지구촌 어디에서든 마음껏 꽃피울 수 있는 디지털 엘리트 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노마드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은 바로 인터넷. 휴대폰도 중요한 목록이다. 낯선 땅에서 호텔을 찾을 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느냐’가 선정의 관건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신이 있는 곳이 서울이든 아프리카 오지든 간에 인터넷과 연결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노마드 족이 될 수 있다. 떠날 수 있고 떠나기를 바라는 당신이라면 장소는 문제되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유목민이란 개념을 화두로 삼아왔던 자크 아탈리는 일찍이 이런 말을 남겼다.

“30년 후에는 적어도 인류의 10분의 1이 부유하든 가난하든 유목민이 될 것이다. 뿌리의 개념은 점점 희박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시민이나 소비자, 배우자 혹은 노동자가 되듯이 앞으로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출세와 승진과 거리가 먼 삶 대학에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취미생활로 즐기던 무선 통신 쪽으로 직업의 방향을 튼 이현용 씨(28세). 그는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시스템 장비 개발자로 일하다가 얼마 전 귀국했다. 3년간 업체에서 나름대로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던 중 집안에 사정이 생겨 귀국해야 했다. 일에 있어서만큼은 미국에서도 ‘전문가’로 인정받았던 그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귀국’이라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직장이나 일감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인터넷과 메신저, 휴대폰을 통해 일감을 구한다.

그는 하루 24시간 중 15∼16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내지만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구하고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쪽으로 옮겨놓기도 하고, 인터넷 정모(오프라인 정기모임)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메시징 기능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자신의 경력을 담은 영어 소개서를 써서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전문가 집단이 모여 있는 사이트를 찾으면 곧바로 자신의 사이트에 링크시켜 놓는 일도 잊지 않는다.

“동기들은 차츰 직장에서 안정된 생활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난 그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승진, 성공? 그런 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거기에서 성취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요즘은 어느 곳에 가 있더라도 실시간으로 모든 상황, 어떤 사람들과도 연결이 가능합니다.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중요한 정보나 자료도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지요.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있는 친구의 컴퓨터에 들어가 새로운 설계도를 구축해줄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은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내 실력을 인정해주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느 나라든 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삶이죠.”

물론 그들은 외로움과 고독을 느낄 수도 있다. 인터넷이 사람의 따뜻한 체온까지 전달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그들에게는 도전할 그 무엇이기도 하다.

신종 역마살, 그러나 더 실리적인 현대사회의 노마드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변화하는 패러다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몇 가지 키워드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질문: 당신은 언제든 떠날 수 있는가?

현대판 노마드 족은 새로운 정보, 새로운 기술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날 각오를 하고 있다. 그들은 앉아서 보고나 받고 결재하는 책상족을 싫어한다. 전문가 집단일수록 노마드가 될 확률이 높다.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옮겨다닌다.

두 번째 질문: 당신의 지식은 상품가치가 있는가?

무형의 것을 상품으로 만들 지식과 아이디어가 있는가다. “진정한 격차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은 기존 질서를 파괴할 만큼의 창조성과 세계 시장을 향한 공격적 마케팅이다.” 기존 질서를 파괴할 만큼의 창조성 없이는 디지털 시대의 승자가 되기 힘들다.

세 번째 질문: 당신은 호기심이 많은가?

현대판 노마드들은 늘 새로운 환경, 낯선 분위기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 낯섦이 생활의 활력을 주는 요소로 작용해야 한다. 새로운 사람과 쉽게 친구가 되고, 낯선 장소, 낯선 음식, 낯선 문화에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네 번째 질문: 당신은 오픈 마인디드(Open-minded)된 사람인가?

순식간에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새로운 이론, 학설, 주장을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노마드 족이다. 과거의 것에 연연하고 현재 보유하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자세야말로 노마드 족이 가장 피해야 할 자세다.

다섯 번째 질문: 당신은 인적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는가?

학교나 출신 지역이 아닌, 지향점이 같고 같은 생각을 지닌 이들과 연결되어 있는지의 여부는 노마드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들은 고유한 라이프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갖고 있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은 안방에서 수천 킬로미터 밖의 사람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시대를 가능케 했다.

한 손엔 휴대폰, 한 손에 노트북. 간편하게 꺼내볼 수 있는 PDA와 잘 준비된 여행 가방. 손 닿는 곳에 있는 여권과 어디서든 막힘 없이 사용 가능한 신용카드. 이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떠날 것을 두려워 않는 당신의 용기다.

(Esquire, 김민정)

※ 의식적, 무의식적 서핑하는 꼴에서 좀 지난(?) 개념이 떠오르다. 아무래도 이노므 역마살은 어쩔수가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