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혹은 '낭만적 사랑'이라 부르는 환상은 어떤 서사(narrative)를 지닌다고 믿어진다. '낭만'혹은 '로맨스, 로망스'라는 말 자체가 '이야기하기'라는 뜻을 지니며, 근대의 낭만적 사랑의 발생은 소설의 대중화와 시기가 일치한다고 한다. '낭만적 사랑'의 당사자는 어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과정을 만들어야 한다. 상대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생을 살아온 사람이다'라는 것을 털어놓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의 역사를 알기 원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나의 서사를 주고, 그의 서사를 받기 원한다. 그리고 그만이라도 나를,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이해하고 기억해주길 원한다. 마치 신(God)이 나를 알 듯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나를 모르더라도 그만이 나를, 나의 내면을, 나의 무의식을 알기 원한다. 내가 그에게 나의 진실을 알려주었으므로 그가 이 궁창 속에서 내 존재의 증거가 되길 원하는 것이다. '우리 만난 지 100일 됐어요' 기념일을 챙기고, 이벤트를 열고, 사진첩을 꾸미는 일들이 모두 전형적인 '낭만적 사랑 만들기'에 해당한다. 낭만적 사랑의 항해에 이정표가 되는 것이 흔히들 '진도 나가기'라 부르는 성적 접촉이다. 손잡기, 키스, 애무, 섹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 말이다. 이러한 코스는 우리에게 너무도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만약 섹스를 너무 빨리 하게 되면, 당황하기도 한다. "아… 이런, 실수했네… 이제 어쩌지?" 그런데, 하는 동안 좋았으면 됐지, 대체 뭐가 실수라는 걸까? 섹스 자체가 실수인 것이 아니라 전체 서사에서 섹스의 배치가 실수라는 것인데, 과연 그 서사가 그다지도 절대적일까?

만나자마자 섹스부터 하고 난 우리의 세 커플들은 어찌 되었나?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이들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 쓰기에 빠져 있다. 심지어 그녀는 특유의 연극기로 서사를 과장하고, 소비한다. [베터 댄 섹스]의 이들은 뒤늦게 '낭만적 사랑'의 징후를 포착하고 전형적인 '허둥대며 서로를 찾다 다시 만나기'를 재현함으로써 '낭만적 사랑'에 귀의한다. 그들은 모래시계 모양의 서사를 쓴 셈이다. 사실 이들은 '낭만적 사랑'의 서사와 지향을 폐기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이들, 특히 그녀는 '낭만적 사랑'의 서사를 애초에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며, 마지막까지도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가 좋으냐, 싫으냐?"는 남자의 질문에 "처음 만난 남자가 좋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아무런 환상없이 대답한다. "그럼 나랑 사귈래요?"라는 남자의 제안에 "원래 손부터 잡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며 가볍게 응수한다.

(멋지다! 그녀의 자율적 성윤리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중,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봤다. 6mm 에로영화 감독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으로 촬영전부터 무수히 많은 관심을 받았던 영화를 조금 지나서야 제대로(?) 봤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라고는 짧다는 것, 야하다는 것, 그리고 여배우의 몸매가 훌륭하다는 것 정도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느낌은 글쎄.. 생각보다 괜찮았던 것 같다.

영화의 커다란 줄거리는 약혼자가 있는 여자가 우연히 남자를 만나 원나잇데이트를 하고, 다시 만나 동거를 시작하고, 서로의 몸에 익숙할 즈음 남자의 식어버린 열정에 여자가 떠나게 된다는 그런 스토리였다. 스토리로 따지자면 별반 새로운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이 영화가 특이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기사에서도 지적 하였듯이 사랑이라는 narrative의 순서가 뒤바뀐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사랑이라는 관계를 섹스라는 것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는가? 섹스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의 고리타분한 주제에서 벗어나 기존의 관계에서 종속적이기만 했던 섹스의 지위(?)를 한층 격상시켜놨다. 즉 영화의 narrative가 대사보다는 두 배우의 몸짓과 행위를 통해 전달되고 있었으며, 그들의 관계변화 역시 행위를 통해 표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러브신, 사실적인 키스하는 입술의 마찰음, 젖은 성기가 부딪히는 질척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다지 야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그것은 기존 에로영화가 표현하고 있는 섹스에 대한 환상을 거부하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 섹스와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한 정의에 감독이 더 집중하였기 때문에 그런것이 아닐까 싶다. 이것은 영화[오수정]에서 보여지는 본능적이고 사실적인 섹스와는 또 다른 모습의 섹스였던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는 "에로판 <봄날은 간다>"라는 별명을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의 완수를 위해 영화는 중간중간 '니꺼 귀여워. 내꺼랑 사이좋게 지내서', 성기로 사과하기. 사정으로 위로받기' 같은 자막이 끼어들어 영화를 직접 설명한다. 이것은 감독이 자신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들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 위해서겠지만, 약간은 계몽적인, 또 약간은 사랑이라는 행위를 섹스로 설명하기 위해 집착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폐단의 전형적인 모습이 바로 엔딩의 패팅씬이 아닐까 싶다. 여자의 환상인지 실제의 상황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이 장면은 개인적인 생각엔 빠지는 편이 나았으리란 생각이다.

감독은 말한다. "나는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밋밋한 사랑도 해봤다. 여자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그런 것 같다. 남자는 섹스, 여자는 사랑. 또 남자들은 성기만 가져도 될 것을 전체를 가지려 한다. 만약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무인도에서 평생을 보낸다면,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서 남자가 바로 옆마을에 여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치자. 남자는 땅을 치고 통곡할 거다. 남자란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맛있는 섹스를 하고 맛없는 사랑을 한다. 정말 솔직한 사랑이란 뭘까. 나는 잠시 잠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남자들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한다는 환상을 일깨우기 때문에 쓸쓸하고, 여자들에겐 사랑의 판타지를 부수기 때문에 슬프다. 나는 어떠냐고?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와는 뜨거운 사랑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절제하자고. 그래서 미지근하지만 생명력이 길다. 몇년을 만나고서도 마주앉아 있으면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아는가"

글쎄 이 얘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미지근한 사랑이 생명력이 길다는 점에는 아련한 동의가 구해진다. 세상의 모든 대상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다. 사랑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섹스를 통해서 사랑을 이해하거나 서사를 통해 사랑을 이해하거나에 따라 사랑은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다. 나는 아직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일부가 맞을 수도 있고, 또 전혀 다른 무언가가 있을것 같기도 하다. 다만 내가 이 시점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어떤 진리보다도 사랑이란 행위가 이해하기 어렵고, 그 존재감에 의문이 가는 것은 없다는 것과 어쩌면 사랑이란 제도로 가두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난 아직도 에로티시즘이 뭔지, 섹스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만드는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보고 싶은 영화다. 인생은 어차피 슬픈 거다. 사람들은 슬픔을 덜어내려 애쓰지만, 아직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슬프다. 그래서 내 영화는 항상 비극이다" (봉만대,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