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buyoshi Araki)
글 쓰는 것이 서툴고, 논리적이지 못한 나에게 어떤 현상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은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명확한 결론으로 도출하게 하는 것은 지독한 고통을 수반한다. 으레 이럴 때면 나는 편린들을 순서 없이, 의미 없이 엮어 짐짓 이런 논란에서 벗어나곤 한다. 주말에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전에 다녀왔다. 사진을 보면서 느낀 몇 가지의 생각을 적어본다.
(STEP 01)
무식한 얘기를 좀 해볼까? 사람들은 사진을 평가함에 있어 어떤 기준을 들이댈까? 일반적-글쎄 일반적으로까지 할 수 있을 까 싶긴 하지만-으로 우리는 3가지 정도의 기준을 들 수 있지 않을 까 싶다. 첫째는, 그 사진이 표현하고 있는 주제 또는 소재를 들 수 있겠다. 무엇을 찍었는가? 이것에 대한 평가와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둘째로는 기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테크닉 적으로 얼마나 우수한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란한 기법의 촬영이나 얼마나 독특하고 세밀한 프린팅을 하였는가가 중요한 점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사진만이 가지는 독창성을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약간 모호한데, 사진이 순간의 예술인만큼 얼마나 찰나의 순간을 잘 잡았는가? 아니면 얼마나 독창적인 구도나 구성을 나타내는 가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기준은 어찌 보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므로 딴지를 건다해도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 세 가지의 기준은 때로는 부분적으로 때로는 전체적으로 종횡으로 엮여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STEP 02)
사진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사진술이 발명되고 이것이 널리 퍼지기까지, 사진 가들의 대부분은 화가였다. 그들은 사진을 회화의 대체물, 또는 보조기구로 생각하며, 미술을 지향하는 것을 사진의 소명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시기를 사진의 회화주의 시대라고 명명하는데, 이것은 사진의 역사에 있어 암흑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한계성에 대한 자성과 자각으로 사진의 기술적 특징을 활용한 합성사진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주제나 내용 면에서는 회화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티글리치는 스트레이트 포토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이것은 회화성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이 때부터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지는 예술성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며, 이것은 20세기 보도사진에 의해 절정을 맞이한다. 현대에서는 사진이 가지는 의미를 보도사진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텍스트로 해석이 가능한 영상매체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결국 포스트모던이 주류를 이루는 현대에서 사진의 의미는 재현성과 표현성의 경계가 모호해 지며, 장르의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
(STEP 03)
일반적인 기준에 의하면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잉크젯프린터로 프린팅된 한장 한장의 것은 모두 형편없는 작품이다. 1층에 전시된 이야기 도쿄, 소설 서울에서 보이는 연작만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첫째, 찍혀진 사물 모두는 그 소재가 지니고 있는 일상성 내지 범용성(?)에 의해 비판받을 만 하다. "아니다. 도시를 나타내지 있지 않느냐"라고 우긴다면, 둘째 기준에 이 사진은 다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보통의 사진작가들은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수성에 의해 프린팅을 무척 강조한다. 이것은 회화가 판화보다 희소성이 높은 이유가 단일품이라는 데 착안한다면 더욱 이해하기 쉬워진다. 사진은 판화와 마찬가지로 필름은 동일하지만 프린팅에 의해 그 희소성을 가진다. 안셀 애덤스가 그토록 주창한(?) 존 시스템만 보더라도 사진가 에게 있어 프린팅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는 알 수 있다. 아라키는 그의 사진을 프린터로 출력하였다. 물론 출력물의 품질이 어떤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막눈인 내가 보기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프린팅의 독특함 내지 중요도가 떨어졌음에 틀림없었다. 일단 색조의 표현에 있어서 그랬으며, 디테일 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떨어졌다. 셋째 그럼 이 사진들이 독창적인가? 이것에 있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순간의 아름다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독특한 구도가 보여지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구성 역시 유진 스미스식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듀안 마이클식의 독특함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진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STEP 04)
그럼 이야기 도쿄, 소설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 오늘날의 사진은 다양한 텍스트로 해석 가능한 영상매체로서의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즉 그는 사진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사진 하나하나에 대한 의미보다는 전제적인 심상을 강조하고 있으며, 영상매체인 사진은 설치미술로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야기 도쿄, 소설 서울에서의 서울의 모습은 도쿄의 현실을 조명하기 위한 비교대상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설이라는 부제를 붙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서울의 모습에서 노스텔지어와, 동시에 비현실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느꼈을 것이다. 사진하나 하나는 아무런 연관 없이 배열되어 있다. 4가지 정도(?)의 큰 카테고리로 대략 서울→도쿄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과거→현재의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다. 각 카테고리는 명확한 주제의 구분이 없으며, 은연중 두 도시의 모습이 오버랩 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이야기하고 있다. 서울의 과거와 현재, 도쿄의 현재, 두 도시의 상관성 등.. 물론 이것은 명확한 결론도 없으며, 관람자의 감상 포인트 역시 달라질 수 있다.
(STEP 05)
아라키라는 작가에 대해 난 일전에 한번도 듣거나 본 적이 없었다. 전시회의 카탈로그에는 그를 일본의 로트렉이라 했다. 로트렉과 아라키를 창녀를 그렸다는 소재 적인 측면에서 굳이 연관짓는다면 할 말 없지만, 나는 이 의견에는 별 동의를 하지 못 하겠다. 내가 보기에 그는 편집증 적이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작가라는 생각만이 든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오브제들 이를테면, 물고기, 코끼리, 도마뱀, 고양이 등이 이러한 점을 설명한다. 신화적으로 물고기는 다산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오늘날 성적인 환상으로 변질되었듯이, 그는 물고기의 잘려진 단면을 통해 여성의 음부를 연상시키게 하며, 새디스트적인 환상을 표현한다. 또한 도마뱀은 일반적으로 행운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작품에서 도마뱀을 통해 성적 환상, 또는 몽환적인 공상을 표현한다. 이것은 코끼리의 경우도 동일하게 적용가능 하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고양이는 작가 자신을 표현하는 듯 하다. 일본에서 고양이 역시 행운의 상징이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작가의 현실인식과 자아의 표현을 나타내는 듯 하다. 물론 이러한 상징에 대한 분석은 지극히 주관적인 사유에 해당하기에 반론의 여지는 충분하다. 하지만 어떤가 그가 그 나름대로 마구 표현하였듯이 관객인 나 역시 작품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분석을 해대는 것이다.
(STEP 06)
다시한번 말하지만 나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작가관과 작품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현재의 네오리얼리즘 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단지 내가 느끼는 것은 현대의 미학적 개념이 모호한 것처럼 그의 작품 역시 모호하며,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 역시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것은 전시장 디력션을 맡은 키타자와 히로미의 다음과 같은 설명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라키에 있어서 서울, 한국이란 무엇일까, 타자이지만,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며,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땅이 아닐까. 아라키는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20년의 세월을 거치며 겨우 하나 확실히 안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동경의 하늘과 서울의 하늘은 하나다.'
흠…..스고이….
음…내가 원래 이렇게 긴글은 절대 읽지 않는데…다 읽었다..머리아프다.
아직 사진에 대해서 작품에 대하서 잘 모른다.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피사체가 무엇인지 자체도…그냥 내 느낌은 그랬다….누구나 사진작가가 될 수 있다는 느낌~~
난 아직 이쁜 피사체만 찾아다니고 있나부다..
가만보면 다의적인 놀이(?)는 어떤 것이든지 많은 골수팬을 거느리고 있는 듯 하다. 왜냐면 놀이에 빠져드는 사람에게 적당한 도전의식과 자기반성을 느끼게 해주니까.. ^^
험 어렵다..나두 이뿐거만 찾고 있나부다..그 사실적인 피사체의 표현에 난 할말을 잃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