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 Portrait

1629 (30 Kb); Oil on canvas;

The Mauritshuis, The Hague

020926and Saskia in the Scene of the Prodigal Son in the Tavern

c. 1635 (120 Kb); Oil on canvas,

161 x 131 cm; Gemaldegalerie Alte Meister, Dresden

Portrait of the Artist at His Easel

1660 (120 Kb); Oil on canvas,

111 x 90 cm (43 1/2 x 35 1/2");

Musee du Louvre, Paris

Self-Portrait

1661 (110 Kb); Oil on canvas,

114 x 94 cm; English Heritage,

Kenwood House, London

Self-Portrait

1669 (80 Kb); Oil on canvas,

86 x 70.5 cm;

National Gallery, London

현대사회를 흔히 정보사회로 분류한다. 매일 쏟아지는 정보는 과거, 정보의 획득 및 교환의 차원에서 선택에 의한 구별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매체의 범람은 의식 없는 유행과 가치 체계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정보의 기회균등은 역설적으로 가치 획일화를 조장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가치의 공황과 의식의 분절화 속에서 개인은 과거와는 다른 자아상실을 경험하게 되고, 역설적으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받고자 한다.

정체성의 확립?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으로 15세기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의 시대는 神중심의 사회였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계기로 인류의 관심이 인간에게로 전이되면서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다. 미술에서는 이러한 자아에 대한 관심과 표현을 자화상이라는 장르 속에서 발전시켜왔다.

역사상 많은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을 통해 자아를 표현해 왔다. Rubens와 Velazquez는 자신의 존재를 강조하기 위해, Durer는 자신의 모습을 대상으로 얼굴 표정을 연구하기 위해, Courbet는 자기 인식에 대한 조형을 구축하기 위해, Gogh는 자기 확인을 위한 대결의식 구도로써 자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Rembrandt는 어떠한 의도나 변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는 Leonardo나 Durer처럼 그가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Michelangelo처럼 후세까지 그의 말이 전해지는 존경받는 천재도 아니었다. 또 당시의 지도적인 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던 Rubens처럼 달필의 외교 사절단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산의 비애와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다른 거장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인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참고로 Rembrandt는 63년이라는 길지도 않은 생애에 약 60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화상을 그린 화가는 서양 회화 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으며, 굳이 비길 만한 예를 찾자면, 짧고도 비극적인 생애를 산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Gogh를 들 수 있을 것이다.)

Rembrandt는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레이덴대학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기 때문에 레이덴의 화가인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에게 배우고, 이어 암스테르담에 나와 P.라스트만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1624년 레이덴으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독립하여 아틀리에를 열었다. 32년까지 완전한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어 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프 박사의 해부”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였다. 그 후 약 10년간은 생활이나 명성에 있어서도 가장 혜택 받은 시기였다. 34년 명문가문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혼인하여 당시의 세계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많은 수입과 제자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함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 기호였던 평면적인 초상화 등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외면적인 유사성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 인간성의 깊이를 그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해지면서 종교적(또는 신화적) 소재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따라서 42년의 명작 “야경(夜警)“의 제작을 고비로 갑자기 세속적 명성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사수협회(射手協會)의 주문에 의한 단체초상화인데 Rembrandt는 당시 유행하던 기념 촬영적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하여 대담한 극적 구성을 시도하였다. 더욱이 이해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가 죽음으로써 인기와 아내를 동시에 잃은 그의 생활은 차차 고통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위대한 예술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아들 티투스의 성장과, 45년경에 맞은 마음씨 착한 둘째 부인 헨드리키에의 내조는 그의 예술을 더욱 원숙하게 하여, 오늘날 대표작이라고 하는 대부분은 4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으며, 56년 파산선고를 받아 일찍이 행복한 생활을 위해 구입한 저택도, 예술적 영감을 한없이 자극하던 여러 가지 미술품도 모두 그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62년에는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68년 티투스마저 죽자, 그도 이듬해 10월 유대인 구역의 초라한 집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죽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정체성이란 무엇이며, 이것의 표현은 어떠한 의미가 있고, 또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분석함으로써 자아인식과 그것의 표현사이에 간극을 줄여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위의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 가를 생각했다. 예술은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다만 그의 인생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물리적인 시간을 전달함으로써 이것을 갈음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