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를 결국(?) 봤다. 선배한테 대강의 영화줄거리를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 역시나 불편한(?) 심정은 마찬가지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보고 있으면 아프다는 느낌을 받는다. 리얼리티 문학가 출신답게  사회의 폐부를 공개적 때로는 우회적으로 예단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시대에 젖어 속물화 될 때로 돼 버린 내가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받는다. 지나친 진실은 오히려 역겹다? 이게 그의 영화에 대한 나의 느낌이다.

이것을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려 정리하자면 "이창동 감독이 주제 의식적 측면에서 일관되게 추구한 것은 인간의 존엄(humanism)에 대한 표피적 접근이 아니라 인간적 굴욕 또는 창피함(humiliation)의 근원에 대한 심층적 해부라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로 돌아가자. 오아시스에서 나는 크게 두 가지 부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첫째는 판타지로 자칫 우스워 질 수 있는 표현기법을 용감하게 썼다는 점과 그 환상의 시점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의미하는 시점의 모호함은 그것이 공주(문소리 分)에게 투사된 종두의 판타지인가, 장애를 극복하고 종두(설경구 分)의 진심에 화답하기 위한 공주의 욕망인가라는 것에 대한 것일 것이다. 이 모두가 가능하고 또 이 모두가 부정될 수 있는 그런 열린 구조가 이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 것 같다.

둘째로 정사씬의 표현이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나에게 말해주었던 선배의 말처럼 나 같은 세속적인 필부들은 이 씬만큼은 정상인(?) 공주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통념에서 정사씬만큼은 가장 아름답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오르가즘의 완성을 통해 신체적 변화(?)를 유도한다. 왜 eroticism과 porn의 차이를 닭의 표현을 빌려 설명한 그 유명한 에로티즘의 거장(?) 잘만킹도 그러지 않았는가..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런 것을 기대하는 심리를 비웃었고, 또 인간적 창피함을 느끼게 하였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단에서 거부당하는 캐릭터를 통해 진실은 무엇이고, 누가 더 창피한 가를 묻는 영화. 그런 영화가 오아시스였다.

이 영화에서 조차 낭만과 예술성을 따지고 휴머니즘을 얘기다면 왠지 나에겐 "타인의 취향"에 대한 소위 화이트칼라들의 폭발적(?) 반응과 같은 지적 허영을 느낄 뿐이다. – 이 글은 지극히 사적인 견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