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달콤한 인생
어둡고 차가운 도시를 배경으로 야수적 내면을 드러내는 남성들의 영화를, 우리는 필름누아르라고 부른다. 전통적으로 필름누아르는 음습한 범죄의 세계나 심리적으로 뒤틀린 인물의 내면 등을 통해 비정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진실을 설파해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누아르에서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이 실체를 결정하고 분위기가 플롯을 압도하며 내러티브성(narrativity)이 내러티브로 등장하고 초점이 ‘무엇’에서 ‘어떻게’로 옮아가며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는 영화학자 토마스 샤츠의 말처럼, 누아르에서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주인공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어두운 내면을 표현하고, 건물 벽에 비친 커다란 그림자는 공포의 깊이를 보여주며, 극단적인 로키 조명은 이 세계의 치명적 그늘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누아르영화에서 양식화된 비주얼은 영화의 내러티브를 풍부하게 하는 것을 넘어, 때때로 내러티브 그 자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본격 누아르’ 또는 ‘누아르 액션’을 표방하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 또한 많은 대목을 비주얼로 설명하는 영화다. 인생의 화려한 정점에 섰다가 급작스레 끝없는 나락으로 수직추락하는 한 남자, 선우의 여정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필름누아르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양식화된 스타일의 향연이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은 1950년대에 수명을 다한 필름누아르를 무덤에서 벌떡 일으키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로만 폴란스키가 '차이나타운'에서, 데이비드 린치가 '블루 벨벳'에서, 코언 형제가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서 그랬듯, 자신만의 누아르를 창조하려 했다.
'달콤한 인생'이 가장 중점을 둔 요소는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다. 따지고보면, 필름누아르라는 이 소장르의 이름이 유난히 어두운 로키 조명과 극단적인 콘트라스트에서 기인한 것이니 당연한 일. 하지만 화면은 흑과 백의 충돌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호텔 스카이라운지의 경우, 어두운 분위기에 강렬한 흰색이 뿜어져 나오지만 커튼, 테이블, 바에 강렬한 붉은색을 심어놓았고 내벽을 녹색 톤으로 만들어 화려한 느낌마저 준다. 김지용 촬영감독은 “빛과 어둠의 콘트라스트뿐 아니라 컬러의 콘트라스트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둘..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엔 세 가지 이야기가 포개져 있다. 하나는 매를 맞으며 돈을 버는 퇴물 복서, 다른 하나는 소년원에서 권투로 갱생하는 복서 이야기이며, 그리고 마지막은 둘이 만나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류승완 감독의 체취가 물씬한 것은 당연히 소년원 복서 이야기이다. '주먹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이'에 이은 막장 인생 3부작이라 부를 만하다. 아니 이것은 '죽거나…'의 류상환('주먹이…'에서도 류상환)의 성장담이다.
'죽거나…'와 '피도 눈물도…'에서 류승완은 이전의 한국영화에 없던 감수성을 보여주었다. 발이 부르터라 뛴 취재기록이거나 직접 살아본 체험이 아니면 건져내기 어려운 막장의 느낌, 그리고 기습적으로 내지르는 펀치 같은 별난 캐릭터들(이를테면 '죽거나…'의 깡패 태훈)은 젊은 작가 류승완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폭력교사를 두들겨패고('죽거나…') 폭력남성에게 복수를 가하는('피도 눈물도…') 쾌감까지 안겼다. 투견장으로 집약한 개싸움판의 자본주의에 대한 형상화는 박진감이 있었고 박진감을 떠받치는 진한 욕설은 류승완이 자신의 언어를 갖춘 이야기꾼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네가 담임을 때렸니? 가 아니라 네가 담임 씹창냈지? 가 그 어투이다).
'주먹이…'는 앞선 두 작품보다 훨씬 깊어진 감동을 전작보다 조금 떨어지는 선도로 보여준다. 훨씬 깊어진 감동이란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이제껏 이야기꾼의 개성적인 말솜씨가 두드러졌다면, 그리고 장르적인 장치에 기대어 말했다면, 이번엔 거의 처음으로 배우로 하여금 스스로 얼굴을 들이밀고 이야기하게 한다. 류승범은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에서 설렁설렁한 면을 걷어내고 며칠 밥 굶은 맹수처럼 바싹 독이 오른 눈매를 더하여 보여준다. 변희봉, 천호진, 기주봉, 나문희 등 중견배우들은 주름살과 제때 깎지 않은 수염 그리고 핀이 나간 듯한 눈동자로 자신의 굴곡진 삶과 그 안에 숨겨둔 희망을 드러낸다. 식상할 수도 있는 중견배우들이 자신의 얼굴만으로 낯선 이야기를 건넨다. 특히 류승범과 천호진은, 류승완이 좋은 배우를 고르고 좋은 배우들 속에 숨은 보석을 찾아낼 줄 아는 뛰어난 감독이라는 증거다.
또 한 가지 미덕은 진심을 드러내려 고투한 흔적이 보인다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의 마지막 장면에서 바닥 끝까지 내려간 택시기사 이혜영은 딸을 만나러 온양(감독의 고향이기도 한)에 가겠다고 말한다. 상투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가족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건 사투에 가까운 것이다. 류승완은, 가족끼리의 화해를 일시적 봉합으로 해결하려는 많은 값싼 시도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 류승완은 이번엔 더 깊이 들어가 싸운다. 류승범이 감옥으로 면회 온 아버지에게 던지는 “불편해. 오지마”라는 대사는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버릇없는 아들은 싸가지 없는 대사로 자신의 사랑을 숨겨 아버지에게 보내고,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그 말을 품어안는다. 평생 서로 사랑하지만 평생 서로에 대해 섭섭함을 느끼는 게 가족이다. 류승완 감독은 가족이 이런 거라 되뇌며 쓸쓸하고 가슴 아프게 한다.
그런데 이런 미덕은 거꾸로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권투로 치자면, 류승완은 알리처럼 15라운드를 다 뛰면서 맞수의 진을 모조리 빼낸 다음 카운터블로를 날리는 복서가 아니다. 그는 짧게 순간적으로 끊어쳐 상대방의 넋을 빼는 유형이다. 큰 장점으로 사소한 단점을 막아야 그의 권투는 빛이 날 것이다. 같은 막장 인생이라 하더라도 최민식쪽 이야기는 조금 섭섭하다. 펀치 드렁크 현상이나, 김광선의 금메달 이야기는 어디서 들어봤음직한('바람난 가족'에서 한국 주니어 웰터급 5위를 지냈다는 광국이 이야기. '주먹이…'의 두 선수 체급도 63kg 이하의 주니어 웰터급) 것이고, 최민식을 등쳐먹는 임원희와 오달수의 캐릭터도 솔깃하지는 않다.
최민식의 얼굴을 보며 감동받을 준비를 다 했건만, 우리는 최민식에 대해 그리 많이 알게 되지 못한다. 감독이야 최민식과 류승완의 인생이 얼마든지 교환가능하고 삼투가능한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최민식을 둘러싼 에피소드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최민식의 축이 흔들리면서 임원희와 오달수까지 흔들린다(천호진은 예외적으로 살아남는다). 왜 임원희는 그렇게 변신을 하게 되었을까 또는 최민식과 류승범이 같은 체급이기는 한 걸까 같은 사소한 궁금증이 생기고 그러면서 몰입의 강도가 떨어진다. '피도 눈물도…'에서 칠성이(백일섭)네가 어색한 얼룩으로 남아 자꾸 쓸데없는 궁금증을 자아냈던 것처럼.
(cine21)
※ 4월 1일에 개봉한 영화를 4일만에 두 편 다 봤다. 두 편을 다 본 느낌이라면 달콤한 인생에서는 기사에서 처럼 스타일리쉬 한 공간과 구도, 색감과 질감을 얻었다면, 주먹이 운다에서는 류승범의 물오른 연기와 절제된 슬픔이 남았던 것 같다. 이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을만큼 뛰어난 비주얼을 보여주는 한국영화를 보면서 내심 흐뭇했지만, 2% 부족한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 싶다.
개인적으로 달콤한 인생에서는 총이라는 비현실적(?) 무기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비극적인 삶이 오히려 희극적인 상황으로 돌변하는 것을 느꼈고, 주먹이 운다에서는 이제는 쉬어야 할 때라고 한 최민식의 뒷말이 가슴에 퍽 박힐만큼 내러티브만 바뀌었을 뿐 결과적으론 똑같은 형태의 막장인생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굳이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주먹이 운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특히 영화의 결말이 만약 무승부거나 쌩뚱맞은 최민식의 승리로 끝났더라면 아마 결과는 반대가 되었을지 모르겠으나, 다행스럽게도 영리한 류승완 감독은 두 막장인생의 대척점에서 류승범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또한 최민식 분량을 제외한 절반의 성공을 보는 것 만으로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영화를 본 후 곰곰히 되씹어 생각해 봐도 두 영화 모두 기저에는 인생에 대한 비극적인 시선이 놓여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사소한 오해가 한 인간을 나락에 떨어뜨릴 수도 있고, 헌신적인 충성심은 가장 깊은 애증이 되어 돌아갈 수도 있었으며, 더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나락에서 피어올린 희망도 서로에게 주먹을 들이대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지어야 한다. 어찌보면 당연한 세상사일지도 모르지만, 아니 어쩌면 이것이 지독한 현실일지 모르겠지만, 어둠속에서 어둠을 느끼는 기분은 과히 유쾌한 것만은 아니더라..
아무튼 황정민과 류승범, 그리고 천호진의 연기는 한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호연이 아니었나 싶다.
아 맞다. 그 아저씨 이름이 황정민 이었지.
아마도 둘 중 한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 난 달콤한 인생을 볼듯. 풀어헤쳐져 보이는 유승범의 캐릭터는 언제나 별로 안땡겨 -_-;;
유씨하고 류씨하고 서로 다른 성인가? 두음법칙이 있다지만 말이야….
(내용이랑 전혀 상관없는 궁금증….ㅡ,ㅡ;;;;;;)
柳 자로 쓰는 성은 류로 하고, 劉 , 兪 자로 쓰는 성은 유로 하고 그런거 아닌가요? 뭐 실상 쓰이는건 마구 섞어 쓴다지만..
내 주변의 '류"씨 들은 죽어라고…'류' 로만 쓰더라구…
류와 유는 다르다고 하대요.. 유일하게 아는 류씨성의 처자가 그럽디다..
100% 만족스런영화는 있으세요??
^^; 가끔 100% 만족도 하곤 하지요…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은정님의 말씀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스브적~
"정말 날카로우셔요~!!"
100% 만족스런 영화는…공짜로 본 잼나는 영화…흠흠~~
날카롭긴.. 거참.. 그제 본 연극에 비하면야.. 최고지..^^;
아니..만족스런거있다시면 주말에빌려다가볼라고 했는데..
절대 비난, 비아냥의 뉘앙스가 아니었는데…대략난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