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재시인 이상(李箱)

한동안 금홍은 마담으로 '제비' 카운터에서 일하고, 이상은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가 밖으로 기어나오는 생활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그의 제비다방 시대는 1933년 7월 14일 개업으로부터 1935년 9일, 파산하기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가장 격렬한 사랑마저 이렇게 금방 끝나고 만 것은 폐병 때문에 성 기능도, 보석을 사줄 만한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 여자에게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그는 1933년 여름부터 1934년 여름까지 이상이외의 남자를 만난 적인 없을 정도로 자신에게 몰입했던 금홍에게조차 불성실하게 행동했다. 같이 산 지 1년이 지나자 금홍은 이상에 대해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이야. 게다가 돈도 벌어올 줄 모르고'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그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금홍에게 천대를 받던 1934년 그는 <조선 중앙일보>에 발표한 '오감도'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미친수작, 정신병자의 잡문이라는 혹평을 받아 결국 연재가 중단되었지만 열화와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1933년과 1934년은 화려한 문단 등단뿐 아니라 파산, 금홍과의 파경으로 가득찬 해였다. 당시 그가 느꼈던 좌절은 다음의 글에 잘 드러나있다.

"하루는 나는 이유없이 금홍에게 몹시 얻어맞았다. 나는 아파서 울고 나가서 사흘을 들어오지 못했다. 금홍이가 너무 무서웠다. 나흘 만에 와보니까 금홍이는 때묻은 버선을 윗목에다 벗어놓고 나가버린 뒤였다."

금홍과 서먹해질 즈음 그는 동인들과의 만남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금홍이 나간 직후 그는 잠시 카페 '쓰루'에 있었던 여급 권순희에게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여복 없는 그에게 이도 오래갈 리 없었다. 그녀를 짝사랑하다 자살소동까지 일으킨 친구 정인택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 채 둘의 결혼을 성사시키고 결혼식의 사회까지 맡아주었던 것. 그 후 그는 박태원, 김유정과 어울려 다니면 여러 카페를 전전하며 심신을 소모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그가 했던 한마디는 그의 생활을 잘 드러내준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절망한다."

'제비'다방과 금홍을 잃은 후 그는 아버지의 집을 저당잡혀 인사동에 카페 '쓰루'와 광교 근처에 다방 '69'를 개업했다가 곤 망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명동의 '무기'를 설계해 개업하려했으나 중도금이 없어 도중 하차하고 말았다. 빈민촌으로 가족을 이사시킨 이상은 묵묵히 따르는 아버지에 대

한 죄책감과 자신의 무능력 사이에서 방황했다. 금홍에 이어 권순희와도 실연하고만 그는 패배감에 젖어 잠시 시골로 잠적했다. 그곳에서 그는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수많은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그는 금홍과 권순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가면 '봉별기', '날개', '지주회시', 그리고 '종생기'등과 전문시 음화시, 문명 비평류의 수필 등을 산더미처럼 쏟아내었다. 이 수많은 작품들이 술에 절어있던 한밤 중에 쓰여졌다는 사실은 '천재 이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시켜준다.

1936년, 이상은 이화여전 출신인 여류문인 변동림(이상이 죽은 뒤 순화 김환기의 부인이 된 김향안 씨)과 결혼해 새로운 인생을 맞는 듯했다. 그녀는 단편과 수필을 몇편 발표했던 신인이자, 이상의 지기인 구본웅의 배다른 동생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상이 가까이 했었던 여성 중 유일하게 정상적인 여성인 셈이었지만, 이것도 이상의 운명이었을까? 간단한 결혼식을 거친 후 곧 동거에 들어간 그녀는 이상의 가족과 전혀 교류가 없었던 금홍과는 달리 빈민굴에서 고생하는 그의 가족과 깊은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결국 그녀는 카페의 여급으로 일하며 입에 풀칠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이상의 여자는 모두 여급이었다는 전설을 다시 확인 시켜주는 셈이었다.

건강악화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등, 국내에서의 비참한 현실과 마주친 이상은 도피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대로 가족과 변동림을 남겨둔 채 1936년에 동경행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경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 가난을 절절히 겪던 그는 '종생기', '환상기', '실락원', '실화', '동경'등의 수많은 작품을 엮어냈다.

이듬해 2월, 극도로 악화된 건강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이상은 운나쁘게도 일본 경찰에게 검거되어 옥살이를 치렀다. 건강이 악화되어 거의 시체나 다름없게 된 그는 보석을 허가받아 평소 너무나도 동경하던 동경제대의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항상여자와 문학에 빠져 살던 이상은 결국 날지 못한 채 변동림이 구해온 레몬의 향기를 맡으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자마자 20대였던 조숙한 천재시인 이상은 스믈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종생기'를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쳤다

(동아일보, 2004.03.08)

○ 고 김향안(金鄕岸) 여사

수화(樹話) 김환기의 미망인이자 수필가인 김향안 여사(본명 변동림·88)가 지난달 29일 뉴욕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김여사의 장례식은 아들 김화영 환기미술관 이사장 등 가족과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지난 3일 치러졌고 유해는 뉴욕 근교 웨스체스터의 공동묘지에 있는 김환기 화백 묘소 옆에 안장됐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수필가로 문단에 이름을 알렸던 그녀는 1930년대 재능과 미모로 문화계에 화제를 몰고왔던 '인텔리여성'이었다. 수화 김환기를 만나기 전인 1936년, 18세에 이복 오빠(화가 구본웅)의 친구인 천재시인 이상을 만나 첫 결혼을 한다. 결혼 3개월만에 이상은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37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과 사별한 그녀는 일본 시인의 소개로 모더니즘운동을 하던 수화 김환기와 만나 44년 5월 재혼했다. 해방 뒤 서울대 교수를 하던 남편 김환기와 함께 55년 파리로 간 그녀는 미술평론을 공부했으며 64년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74년 수화와 사별한 김여사는 남편과 생활했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남편의 유작과 유품을 돌보며 살았다. 김여사는 78년 뉴욕에서 환기재단을 설립하였으며 92년에는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 남편의 업적을 꾸준히 알려왔다. 김환기 20주기인 94년엔 김환기 전기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펴내기도 했다. 95년엔 자신의 수필집 '카페와 참종이'를 내놨다. 두번째 남편 김환기 추모사업을 하면서도 그녀는 90년 첫 남편의 모교인 보성고교 교정에 세워지는 이상문학비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상과 김환기, 두 천재를 내조하며 평생을 문화 예술인들과 교제해온 김여사는 수화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전파해오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꼭 30년 만에 뒤를 따라갔다

…………

지난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건립한 뒤 1997년 별관 겸 기념관인 '수향산방'을 세우면서 "수화 선생은 늘 '사람은 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는 것일까'라고 되뇌었는데 이 수향산방이야말로 우리 부부의 50년 된 보금자리이자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는 꿈을 꾸듯 수화의 곁으로, 둘만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훌훌 떠났다. 김 여사는 천재 시인의 젊은 아내였고, 천재 화가의 반려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받는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천재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천사였을 뿐만 아니라 수필가와 미술 비평가로서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추구했던 여성이었다.

경기고녀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김 여사는 이복오빠인 화가 구본웅의 소개로 1936년 이상을 만났을 때, 신예 수필가로 문단에 입문한 상태였다. 이상의 요절로 1년 만에 결혼 생활을 끝낸 김 여사는 수필을 계속 썼고, 수화 김환기와는 1944년 결혼했다. 그러나 김 여사는 1956년 "10년 시집살이를 하다 보니 글 쓰고 책 읽는 저만의 일이 하고 싶어졌다”며 프랑스 파리로 홀로 떠나 미술 평론 공부를 시작했다.

김 여사의 유학은 1년 뒤 김환기 화백으로 하여금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행을 결단토록 했다. 김 여사는 김 화백이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의 글을 계속 썼다. 김 여사는 수필집 '파리' '카페와 참종이' '우리끼리의 얘기' 등을 통해 파리에서의 이국 체험을 통한 내면 성찰, 예술을 매개로 한 김환기 화백과의 사랑 등등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김 여사는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1992년 환기미술관을 건립할 당시, 김 화백의 작품을 형상화한 타피스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결심, 프랑스의 전통 타피스리 제작소인 고블랭에서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설계와 내부 장식 등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설전을 벌이면서까지 취향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부암동 환기미술관은 마루 한쪽 한쪽까지 환기 그림의 느낌과 결을 맞춘 것으로 유명하다.

김 여사는 일생의 짧은 부분을 나누었던 이상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언급하기를 생전에 꺼렸다. 다만 이상에 대해 "천재는 미완성이다. 사람들은 더 기대하기 때문”이라는 짧은 평을 남겼다. 그는 두 번째로 만나 영원한 동반자로 삼은 천재 수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았다.

그는 수화의 예술에 대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며 "그에게 자연은 곧 인간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화일보 2004.03.08)

○ 뮤즈에 대한 소고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 1977)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 갈라는 내 인생의 소금이며 내 인격을 강하게 해주는 목욕, 나와 꼭 닮은 사람, 바로 나이다."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1929년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 갈라를 만났을 때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1934년 달리와 결혼했을 때, 갈라는 달리의 모든 것이 되었다. 달리 그림의 가장 탁월한 해설자였고,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최고의 모델이었고, 활달하고 영리한 매니저였다.

예술사의 빛나는 위대한 천재들의 성취 뒤에는 어김없이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의 존재가 있었다. 시인 릴케, 철학자 니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천재성을 꽃피우게 했던 루 살로메가 대표적인 경우다. 위대한 음악가 슈만의 아내였다가 그의 사후 제자 브람스를 사랑한 클라라 슈만이나 시인 뮈세, 작곡가 쇼팽 등 수많은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었던 조르주 상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복수(複數)의 천재를 사랑했다는 점, 특유의 지적 예술적 감각으로 자신의 세계를 적극 개척해 나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나, 파리에 가면 우리 둘만을 위해 살고 노력하고 싶어.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 한국 현대미술의 거목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만들었던 김향안도 같은 존재였다.

그는 20세기 문단의 이단아 이상(李箱)이 1937년 도쿄에서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읊조리며 2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 그를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향안, 걱정 말아요. 나 아주 명랑해요. 갈수록 좋은 그림 그릴 자신 있어요." 이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미술사에 남을 작품들과 싸우던 수화는 좌절할 때면 아내에게 편지를 쓰며 위안 받았다.

김향안은 뛰어난 심미안과 교양으로 수화의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수화 사후에 그의 작품을 흩뜨리지 않고 모아 서울에 '환기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한 것은 가장 큰 공적이다. 김향안이 수화와 함께 살던 뉴욕의 아파트에서 지난 2월 말 별세해 뉴욕 근교 웨스체스터의 수화 곁에 묻혔다고 뒤늦게 알려졌다. 올해는 수화가 떠난 지 꼭 30년 되는 해. 수화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처럼, 두 남녀는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 다시 풀려는가.

(조선일보 2004.03.08)

○ 이상(李箱)의 레몬향기

어느 글에서 읽은 것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이상이 동경의 어느 병원에서 작고했을 때 레몬 향기를 맡고 싶다고 하면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던가. 그래서 후세의 학자들이 과연 이상의 레몬향기는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하고 고심하면서 그것에 대해 글도 쓰고, 그 유언의 말을 근거로 박사학위도 받았다는 것.

아마 일제라는 척박한 시대에 레몬향기는 시인의 이상향 쯤으로 상징화되었으리라.

그런데 이상과 4개월을 같이 살다가 그가 죽은 후 1930년대 후반 행방불명된 변동림은 성과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고 김환기의 아내로 오랫동안 외국에서 같이 생활하다가 김환기가 죽은후 어느 날 70년대 후반이었던가.. 내가 바로 이상의 아내였다라고 폭탄선언을 해서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이상에 대해 너무나 과장과 왜곡이 심하다면서 그 대표적인 말이 바로 '레몬향기'라고 해서 사람들을 또한 놀라게 했다. 그러면 이상이 죽으면서 무어라고 말했냐니까 그 할머니 말하길 멜론을 먹고싶다라고 말했을 뿐이라 해서 학자들을 경악케 한 사건이 있었다.

(네이버 블로그)

※ 현대사에 두 천재적 인물인 이상과 4개월, 김환기와 30여년을 같이 살아온 김향안 여사의 부음을 뒤늦게(?) 신문을 통해 알게되었다. 특별히 그녀에 대해 잘은 알지 못했지만, 독특한(?) 이력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는데.. 소리소문 없이 뒤늦게 작고했다는 사실을 접한 후 조금 멍청해진다.

근대 한국미술의 두 거장이라 평가받는 수화 김환기, 서민화가 박수근..

한 사람은 철저한 아카데믹한 서양교육을 받고 자라, 반평생을 타향살이를 하면서 유럽 근대회화의 한국적 모티프의 탐구에 일생을 보냈고, 한 사람은 미술교육이라고는 한번도 받지 못한 채 줄곧 이 땅에 눌러앉아 변변한 대접조차 받지 못한채 쓸쓸하게 사그라졌다. 이 이질적인 두 인물에 의해 한국 근대회화가 발전했다는 것도 이채롭지만, 그 한 축에 천재시인과 천재화가와 함께 살아온 한 여인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채로움을 넘어 드라마틱하기 까지 하다.

사람이 살아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어떤이는 불꽃같이 화려한 삶을 살고, 또 어떤 이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치열한 삶을 살다간다.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삶의 무게를 힘겹게 짊어지고 살아간다. 어떤 것이 더 낫고 더 가치있는 인생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아니 모든 일생이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겠지만, 왠지모를 연민과 동경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주말엔 모처럼 환기미술관에서 수화를 만나고 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