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nopsis..
입양한 아들 수인과 나름대로 정의로운 변호사 남편, 까탈스러운 시어머니와 병상에 누운 시아버지를 둔 가정주부 호정. 얼핏 평범해 보이는 집안이지만, 남편 영작은 젊은 애인 연과의 섹스에 탐닉해 있고, 시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나서 "생전처음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고백하며, 호정 역시 옆집 고등학생 지운과 심심풀이 '찐한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차 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영작의 차가 술취한 우체부 지루의 오토바이를 들이받으면서 이 가족은 아슬아슬한 균열을 넘어 붕괴의 순간을 맞는다.
Step01…
그녀에게 있으나 그에게 없는 것이 있다.
첫째, 자족감이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 고양이처럼 알몸으로 카펫을 뒹굴며 자기 몸의 충만감을 즐긴다.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남편에게귀속시키지 않으며, 반드시 타자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영작은 항시 타자를 욕망하고 필요로 한다. 그는 애인에게"쿨한 척하지만 진짜 외롭죠?" 소릴 듣는다. 아버지의 임종에서도 "간호사년의 치마를 벗기는" 상상을 하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안 날, 룸살롱 소파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눈을 뜬다. 아들이 죽고 나자 애인에게"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미치겠다고 애걸하고, 애인에게 쫓겨나자 비서를 찾는다. 그에게는 자기 충만감이 없다. 호정의 자족감은 그를 열패감에 빠뜨린다. 그의 실존적 열등감은 아들이 죽자 도덕적 열등감과 결부되어 유치하게 폭발한다. 그가 호정을 때리면서 했던 말은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내가 용서가 안 되지?"였다. 그가 "자기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하는 애인, 나아가 더 만만한 비서를 찾는 것은 (유전적 성향일 수도 있지만) 호정에게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그의 마지막 발 동작 역시 이미 <피아니스트>에서 보았듯, 개망신당한 남자의 무안 수습용 오버 제스처에 불과하다). 남자(들)는 자족하지 못하므로, 욕망이 밖을 향해 발산될 뿐,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둘째, 친밀감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원대로 술을 사드리고, 토한 피를 닦아준다. 그녀는 병실에서 남편을 다독인다. 시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고 지지하며, 아들에게는 진심이 통하는 엄마였다. 영작은 아비의 몸을 닦다가도 아비의 허세에 짜증을 내며, 피를 토하자 "호정아!"를 찾는다. 어머니 이야기가 듣기 싫어 이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그는 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는 성적 관계가 아닌 사적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 무력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사적 친밀감은 가족을 운위하는 핵심요소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남자는 친화력이 떨어지며, 친밀감의 담지자는 여자이다(애인 왈, "남자는 나이든 유부남이라도 미성숙하다" 인정?)
셋째, 재생산 능력이다. 부부는 불임이었으나, 둘 다 다른 상대와 임신이 가능했다. 호정의 아이는 태어나 호정과 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영작의 아이는 제거되고 만다. 왜? 남자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아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셈인데, 생산수단은 항구적이고, 노동력은 일회적이다(생산수단을 가진 여자를 남자가 전유할 때만이 남자의 욕망과 의지대로 재생산이 가능하다. 여자를 전유하기 위한 인위적 장에게바로 노동시장에서의 축출을 통한 경제적 박탈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족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은 여자에게있다.
Step02…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월급 65만원을 받아 아내와 두 아이,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의 자랑은 "처남"이며, 절박한 사정을 하러 "온 가족"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복수를 위해 상대의 "아들"을 죽이고, "엄니…"를 부르며 울부짖는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그는 ‘그’이기 이전에 ‘그의 가족’이다. 그가 온전히 개인이었던 순간은 "대학노트 세권에 달하는" 유서를 쓰고 투신하였을 때뿐이었으리라.
여기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든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축을 이루는 두 가족이 공존하다, 마침내 기이하게 충돌한다. 길바닥에 늘어진 죽은 개 마냥, 피할 수 없이 직면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승강이 끝에, 50년 유서 깊은 구덩이에 빠지듯 가부장제라는 허당을 짚고 실족한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 가족을 통해, 성인남성 취업노동에 전 가족의 생계가 달린 자본주의적 압박과 가족주의의 이름을 단 가부장-이데올로기가 모두 소거되었을 경우 여전히 가족을 구성하고 운위시키는 본질이 무엇일지 보여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성인남성 노동의 세가 약화되고, 호주제 폐지 등 가부장-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아닌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관계를 호정과 아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생물학적 토대를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화력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제시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외재적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내재적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Step03…
드디어 바람난 가족을 봤다. 많은 논란으로 호기심이 많았던 작품이었지만 특유의 게으름으로 무마하다 결국에 보게되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유모(?)를 잃지 않았고, 끈임없는 관음증적 시각을 자극하기도 하였다. 어디에나 있음직하고 또 어디에도 없을듯한 그런 영화. 바람난 가족은 그런 느낌을 준다.
영화를 본 후 받은 인상은 거시적인 관점과 미시적인 관점에서의 두 가지 측면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영화에서 각기 다른 두 가족의 모습을 병치하여, 새로운 가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화를 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휴지통 뉴스에 나옴직한 사건파일을 집대성한 모습으로 그 표현에 있어 지나친 현실감으로 오히려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갖게한다. 또한 미시적인 관점에서는 가족내의 각각 구성원간의 새로운 위계질서 및 중심의 이동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부계중심에서 모계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더이상 가족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엮어주는 연대의식이 가족 그 자체에 있지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 아니 부부간에도 더이상 소유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도덕적 의무가 개인의 행복추구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냉소. 이 모두가 영화 전반에 걸쳐져 있으며, 그것은 사회 전반의 도덕적해이(moral hazard)와도 그 궤를 같이한다. 이러한 사회 전반의 도덕적 해이는 급속한 산업화와 그로 인한 경제적 번영에 대한 댓가이며, 지나친 경쟁적 사회구조로 인한 학벌주의, 성과주의, elitism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사회전반의 도덕적 해이는 영화에서 보이는 것 처럼 사회의 기초단위인 가족공동체에서 부터 깊숙하게 퍼져가고 있다.
물론 남자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남성의 시각에서 결말의 쿨한 여성의 모습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여성의 몸에 클리토리스가 박혀 있다는 즉물적 사실은 거듭 환기시키지만, 여성의 몸이 경제 속에 포획돼 있다는 유장한 진실은 한 가닥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페미니즘적 반론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그 기저의 가족의 파괴에 대한 시각만큼은 동의를 하는 바이다.
사회적 의무감으로 부조리와 모순에 대항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생활과 약자에겐 아무런 죄책감 조차 없으며 그 간극에서 방황조차 하지 않는 영작,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수인을 공사장 꼭대기에서 던지는 지루, 젊은 애인에게서 버림받고 또 애써 태연한 듯한 영작의 제스츄어, 방황끝에 찾아간 호정에게 사정하는 모습과 걸레질 하나에 바로 아웃되는 모습, 그리고 호정의 서글픈 러브신.. 이 장면들은 영화 바람난 가족을 이해하는 코드로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아무튼 바람난 가족은 표피적, 내면적 냉소와 유머가 빛을 발하는 영화였던 것 같다.
나도 이거 그저께 봤는데..노트북 사서 맨 디빅만 보고 있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이런 음침한 영화 보지말고 뉴이어 이론에 동참할만한 영화를 봐바~ 러브 액츄얼리같은..
그렇지 않아도..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 보려고 해도.. 아무리 곱씹어도.. 볼 만한 사람이 없네.. 쩝..
아.. 예전이 그리워..T.T
나있잖아~ 케케
very 시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