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el Duchamp은 자신의 작품 '샘'을 앙데팡단전에 출품하면서 심사위원들의 거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항명을 했다고 한다.
1) 변기가 불결하고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전시가 거부되었다면 그것은 변기에 부여한 인간의 관념이 불결한 것이지, 변기란 실물은 이러한 관념과는 무관한 깨끗한 물체에 불과할 뿐 오히려 그것은 사막의 목마른 자에겐 식수를 닮을 수 있는 멋진 그릇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2) 변기를 그리지 않았다고 전시를 거부했다면 변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변기를 잘 그린 그림도 변기를 그대로 찍은 사진도 아닌 변기 그 자체가 아닌가?
3) 변기를 손수 그리거나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전시를 거부했다면 창조의 의미는 반드시 만드는 것에만 있는가? 제시할 수 있는 발견도 창조가 아닌가?
MARCEL DUCHAMP
Fountain
1917/1964
디지털 사진에 있어 포토샵을 이용한 리터칭에 대한 거부는 다음과 같이 항명할 수 있지 않을까?
1) 보이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리터칭은 안된다면, 카메라에 찍히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은가? 사진 자체가 보이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광각계열을 사용하면 가까운 피사체 일수록 커 보이듯이..
2) 보정이 아니라 조작이기 때문에 안된다면, 보정의 정의는 무엇인가? 샤픈 한 두방과 레벨 조작은 보정이고 샤픈 세방과 커브조정은 조작이란 말인가? 과도한 수정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19세기말 회화주의 사진시절엔 오히려 리터칭을 전문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는가? 아날로그적인 닷징, 버닝은 괜찮고, 디지털로 대신하면 안된단 말인가?
3) 감광된 모습과 달라서 그렇다면, 사진이란 찍히는 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인가? 찍힌후에 발견되는 발견의 미학, 제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미지의 크롭자체도 예술이다.
단, 이런 얘기는 가능하겠지.. "진실성이 최우선 되는 분야 – 예를 들면 보도사진에 있어서 조작을 통한 진실의 왜곡은 안된다" 같은.. 위의 사진이 뛰어나다는 건 아니지만, 이미 진부해버린 토론주제가 문득 생각난다.
(보너스) 유진 스미스는 완벽주의자로써.. 프린트 하나를 위해 닷징,버닝,블리칭을 평균 150회 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유진 스미스의 작품들은 인화단계에서 대부분의 명암이 바뀌었을 정도의 리터칭을 거쳤다고 한다.
The Wake, 유진스미스
인화과정에서 사람들의 시선 방향까지 바뀌었음.
슈바이쳐박사, 유진스미스
오른쪽의 톱과 손 그림자는 '상황 설명' 을 위해 '합성' 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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