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베리아 벌판이 연상되는 두텁고 낮은 잿빛 하늘 아래 약간은 시니컬하고, 약간은 삶을 초월한 듯한 4명의 광대 분장을 한 시인들이 등장한다. 음악의 선율에 맞춰 우스꽝스럽게 몸짓하며 노래하는 노란 광대들. 어떤 때는 객석의 관객들과 장난스레 눈싸움을 하고, 힘겹게 끌고나온 침대는 어느새 보트로 변하여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항해하듯 너스레를 떤다. 얼기설기 짜여진 그물이 관객들 머리 위로, 뒤로, 뒤로 온 객석을 덮어버리면 그 위를 쓸쓸하게 걷는 한 사람, 관객들은 그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자청하여 내밀게 된다.

(중략)

겨울의 달밤을 배경으로 애틋한 사랑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무대에서 광대의 빅토리아식 모자가 출발을 알리는 기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연기를 뿜어내고 광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긴다.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 힘든 애잔한 표정과 함께 러브레터 위로 흐르는 눈물방울.. 그 눈물의 편지는 눈송이로 변하였다가 어느덧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폭설이 되어 전 객석을 가득 채우고 결국 관객들을 무릎까지 찬 눈 속에 남겨 놓는다. 관객들이 하얀 눈을 맞으며 모든 시름을 잊고 탄성과 앙코르를 외치면, 광대들은 이에 답하듯이 커다란 풍선을 관객들에게 던져 넣는다. 도대체 누가 관객이고 누가 배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채 공연은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따스한 감동과 축제의 여운으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한다.

(Slava's SnowShow program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학(詩學) 제 1부 비극론에서 비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비극은 가치 있거나 진지하고 일정한 길이를 가지고 있는 완결된 행동의 모방이다. 쾌적한 장식을 한 언어를 사용하고, 각종 장식이 작품의 상이한 여러 부분에 삽입된다. 서술의 형식이 아니라 행동의 형식을 취한다. 또 연민과 공포를 통하여 감정을 정화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많은 철학적 사유를 내포하고 있는데 다른 것은 넘어간다 치고, 여기서 의미하는 연민과 공포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악행이 아니라 악의 없는 중대한 '과오'의 대가로 불행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생기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이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거역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공포를 비극을 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통해 정화시키고, 근원적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비극이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극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아쉽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詩學) 제 2부 희극론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책 '장미의 이름'에서 희극론이 사라진 경위를 중세시대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희극론이 실제로 고의로 불태워 졌다면 그것은 아마도 중세시대 이었을 것이다. 왜냐면 중세시대엔 사회는 늘 엄숙한 분위기에 젖어 있었고, 교회는 종말론을 얘기하여, 사람들을 늘 종교적 흥분상태 속에 붙잡아 놓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세시대엔 웃음이 없는 사회였고, 이것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에코는 희극론을 윌리엄 수사의 말을 통해 다음과 같이 상상하였다. "희극은 코마이, 즉 농촌에서 탄생하는데, 식사나 잔치 뒤의 유쾌한 행사를 가리킨다. 희극은 유명한 권력자가 아니라 사악하지는 않다 해도 천하고 우스꽝스런 사람이 대상이고,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의 결함과 악습을 보여 줘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내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웃음의 경향을 선을 위한 힘으로 파악하고 웃음이 교육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희극론이 정말 이처럼 쓰여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비극론에 대한 대칭적 의미로 상상한다면 다분히 가능한 논리이다.

중세시대처럼 숨 막히는 시대에도 통풍구가 존재하였는데 그것은 카니발이라는 축제였다. 여기서 만큼은 음탕한 행위와 우스꽝스런 언동이 허락되었다. 이처럼 카니발 축제에 등장한 광대나 희극적인 행위가 오늘날 광대나 코미디로 발전된 것이다. Slava's SnowShow에 대해 얘기하고 자 한 것이 지나치게 커져 버렸다.. 아무튼 희극의 기원은 이랬다.

Slava는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광대라고 한다. SnowShow는 그의 대표적인 마임과 공연 중에서 몇 장면을 엮어 만든 것이라고 한다.(그래서인지 약간은 단절된 느낌도 있었다) 1시간 3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은 온통 광대들의 우스꽝스런 제스처와 장난기 어린 퍼포먼스가 있었고, 다양한 시각적 효과와 무대장치가 동원되었다.(공연 중에 느낀 건데 Slava는 정통 연극과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에 틀림없었다)

사실 난 이 공연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 했다. 오히려 다른 관객들의 웃음을 지적허영으로 보고만 있었을 뿐이었으며, 서사적 구성이 아닌 베게트식 구성이 가지는 힘 -요컨대 다양한 텍스트로 해석이 될 수 있다는-에 대한 비판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지나치게 공연을 분석적으로 보고자 해서 인지는 모르겠다. 마치 구석기인들이 ’개념적 사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는 사실과는 반대로 어른들에게는 분석적 사고 없이 웃음을 웃음으로 보는 것은 어려운 것이라는… 아무튼 Slava의 공연은 팸플릿에 쓰인 글귀처럼 베케트의 쓸쓸함, 채플린의 애잔함은 분명 있었다.

장미의 이름에는 아드소 수사의 다음과 같은 독백이 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사람들이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데 있는 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 있기 때문이지"

이 말이 SnowShow와 무슨 관계가 있냐고 하면 사실 할 말은 없지만, 희극이 가지는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