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공문에 대한 답변

정통부 심의 담당자께

저는 레이소다에 활동하는 사진가 박장호입니다.

저는 현재 1994년 영국에 유학하여 현재까지 런던에 거주 중입니다.

우선 간략히 저의 프로필을 드립니다.

영국에서는 고고학과 현대미술로 석사과정을 1994 -1998년까지 이수하였으며 주식회사 닉스의 마케팅 연구원,사단법인 고려대장경연구소 연구원 등의 한 국 사회 활동 경험이 있습니다. 1998년 중앙일보 신문광고 대상과(마케터로), 불교문화지도 국책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2000년부터는 한국현대미술과 관련된 각종 기획과 전시 서포트 경험이 있으며 2001년에는 쌈지스페이스 '소리'에서 '觀'이란 주제로 해인사 디지털 발표 를 기획 총괄했습니다. 2006년에는 서울프라자호텔, 영국에딘버러페스티벌등의 후원으로 3인 vs 3시 (세 남자와 세 도시)란 주제로 사진전시를 가졌습니다. 현재 저는 전시기획과 번역, 집필에 치중하고 있으며 KBS 원드넷 영국 미술파트 리포터이기도 합니다.

저는 위의 프로필을 통해 포르노 제작자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제가 찍는 사진, 저의 주제 혹은 모델로 등장하는 켈리(조경범)는 저의 와이프이며 저희는 1998년 결혼하여 2000년 한국에서 이혼을 했습니다만 줄 곳 함께 런던에서 생활하여 왔으며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현재 영국에서 패션리테일 법인회사인 '켈리마마' kellymama corporation의 대표이며 2003년 한국판 월간 바자 매거진과, 시사저널인 한겨례 21, 2004년 월간 '도 르' 매거진, 다수의 패션북과 리뷰에 소개된 성실한 사회활동인 입니다. 다시 한번 저의 작업(사진)에 주제 일부이기도 한 켈리는 청소년을 유해하게 하기 위해 등장하는 외설적인 포르노 배우가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그녀는 저의 와이프이며 한 사람의 여자입니다.

저는 남녀의 性을 일반화하고 남성주의적 시각으로 몇 가지 보는 방법에만 익숙하여 쉽게 판단하는 비사유적으로 '외설화'하는 단순한 '시각'을 경계합니다. 저 박장호와 조경범은 레이소다를 통한 사진활동, 추천의 장치를 통해 함께 경험하는 다양한 감상자의 시각을 충분하게 존중하고 있으며 레이소다 갤러리를 통한 사진(작업)의 발 표 추천, 온라인상의 활발한 논의를 진지하고 주의 깊게 또한 책임감을 다해 참여하고 있음을 밝혀드립니다. 저희는 예술작품의 중요한 일부분이기도 한 性이란 주제로 다양한 감상자들이 현실을 살펴보고 작업을 통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 충실한 소통을 통해 작업을 해나가는 나(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기회, 일상을(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위대한 '생활'을) 발견하는 성실한 '과정'이 되길 바램 합니다. 저의 작업에 성기의 노출은 작업을 이루는 일부에 불과하며 또한 '일상의 예술'이라는 고민을 통해 발견하고 성취해나가길 바램 하는, 건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분이 기도 합니다. 일부의 관객들이 포르노나 외설로 저의 작업을 매도한다고 하더라도 고민하지 않는 일부 감상자들의 태도들이 창작자가 끊임없이 노력하여 발표하며 이루어 가 고자 하는 건강한 자아를 찾아가고자 하는 과정 행위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못 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민하는 관객과 창작자는 충분히 함께 숨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업은 문제, 고민, 소통이라는 과정, 예술적 환경을 통해 극복하여야 합니다. 예술은 진지한 고찰을 통한 '진정성'으로 나(ego)란 존재를 통해 더욱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는 방법이 하나라면 사회는 건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작업, 예술(참여하는 예술)이라는 성취과정은 다양한 보는 방법을 관객에게 선사합니다. 다양한 시각의 충돌, 문제와 경험, 소통을 통해 이것을 고민하고 참여하는 개개인(관객)은 더욱 이성적인 비전을 찾고 바라 볼 수 있다고 믿고 있기에 변화되고 있는 사회 안에서 性에 대한 시각도 그만큼 다양하고 활발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향유하는 性과 그 시각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일방적이며 병약합니다. 언제까지 외국 예술가의 경우, 외국의 철학과 사유의 경우(예)를 통해서만 인식이 변화되고, 사회와 관습, 예술이 서구의 일방적인 담론만을 뒤쫓아 변해야 한다면 우리의 관습 혹은 예술은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틀과 껍질 안에서 계속 맴돌고 허덕거려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일상과 생활의 일부인 우리의 性이 가지고 있는 우리만의 미학을 다양한 시도와(그것이 실패이든 성공이든) 경험을 통해 우리 스스로도 발견하고 진보해나가길 바램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의 행위, 작품 일부를 이루는 음부만을 보며 유해해질 청소년이 아닌 균형적인 시각으로 자신을 발견하고 더욱 훌륭한 창작을 이루어낼 더욱 나은 표현, 더욱 세련된 작업을 성취하고 이룰 미래의 젊은 창작자들을 더욱 기대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작업, 예술의 '과정'은 항상 '현실'과 '변화'에 부딪칩니다. 기존의 사유에 관념에 노크하며 잠을 깨우는, 말을 거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레이소다에 창작자의 한 사람인 저에게는 '작업의 문제' 이건 몇몇 단순하게 현실을 바라보려 하는 단순한 감상자(고민하지 않는 감 상자)가 우려하는 청소년을 유해 한다는 '보지'(음부)의 문제가 다가 아닙니다. 작업의 어려운 '시도'와 '문제'에는 모든 참여자의 현실의 거울과 그 반영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대충 대충 어디를 가리면 위험하지 않고 여자가 다 벗으면 포르노이고 외설이며 위험하다는 단순한 시각 혹은 판단, 오직 음부(보지) 혹은 노출에만 집중하는 '일방적인' '잘못된 보는 방법'이 지배하는 자아가 사회와의 경계를 왜곡하며 문제를 단절시키는 것은 확실히 더욱 위험한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 단절된 현실에서 더욱 극한 문제를 키우거나 발견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든 관객이든 우리 누구 하나 아무리 다 벗어도 다 벗겨지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절대 벗을 수 없는 관념의 허물은 옷을 벗고 있든 살갗을 벗고 있든 매한가지 무엇으로도 벗겨지지 않은 체 어떤 모습으로도 그렇게 단단하게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가는 관객의 잘못된 혹은 제도화되고 고정화된 '맹목적인 보는 방법'을 관념의 '옷' 그 일부를 우선 민감하게 주시하며 관찰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관객을 건드리고 일상을 제기하며 작업으로 소통해나갈 때 그 과정은 예술이라는 이름의 일부로 성취, 연결되는 것이지만 그 거창하다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관습과 관념마저도 창작자는 경계하게 됩니다. 일상에서 떼어온(재현, 복제) 것, 어떤 이름의 예술로 승격 되야 할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일상을 위해 일상으로 돌려 놓아야 하는 것, 답은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저는 작업은 설득시키기 위해 한다기 보다 고민시키기 위해 합니다. 분명 작업을 통한 소통 과정 중 '고민'은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 보다 훨씬 의미 있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예술이 특별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보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사회'가 그 어떤 사회보다 건강하다고 앞서서도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삶을 숨쉬지 못하게 하는 '위선과 가식'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도사리고 존재하고 있기에 함께 이것을 깨나가는 노력이 행위에 대한 실천과 참여가 진정 어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저는 정통부에서 레이소다라는 훌륭한 소통의 장을 신뢰하여 주시길 바램합니다. 레이소다에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훌륭하고 뛰어난 사진예술가들의 활동장소이기도 합니다만 특정 예술인들을 뛰어넘어 다양하고 훌륭한 다수, '대중'이라는 날카로운 '눈'과 창작자와 관객. 참여자 개인 개인이 소리 내고 대화하며 문제를 정화하고 소통해내는 그 어떤 환경보다 민주적인 건강한 '힘'이 흐르는 놀라운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레이소다의 건강한 힘을 그 어떤 법보다 더욱 무서워하고 있답니다.) 운영자인 아키(박규현)님은 얼마든지 저의 사진을 임의로 삭제 할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않으시고 있습니다. 박규현님이 저와 친분이 없는데 저의 사진으로 불편하고 수고스러운 일을 즐기고 계신 겁니까? 저의 사진이 어떤 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레이소다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니와 또한 한 개인의 불이익을 위해 레이소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더 큰 틀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영자 규현님은 대중의 민주적인 힘(자정능력)과 소통, 고민(작업을 고찰)하여 소리 낼 수 있는 '힘'을 더욱 존중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불편함을 마다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통부에 심의관련자께서는 사진(작업)의 성기를 주목하여 보시기 보다 작업과 관객 사이에서 더욱 진화하고 있는 과정, 작업을 이루고 대는 대중의 소리와 거울(반영), 활발한 소통, 일상을, 고민을, 창의롭고 민주적이기도 한 레이소다라는 더욱 건강한 환경과 의미 있었고 앞으로도 의미 있을 '시간'(과정)을 더욱 주목하고 발견하여 보아주시길 바램합니다.

2006년 6월 20일 런던에서

박장호 올림

※ "예술이란 무엇이다"에 관한 모호함은 "음란"이란 단어의 모호함과 동격이다. 한발 더 "예술이 무엇이다"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 가치의 구별조차 힘든 세상에서 판단의 몫은 국가일까 개인일까, 그것도 아니면 단체인가? 해명의 글에 정규교육을 받았음을 기술해야만 하는 아이러니 만큼 시정명령의 논리는 유치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또 다시 생각해 보면, 예술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다 허용하는 면죄부일 수 있을까? 작가의 문제의식이 사전에 계획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찰자의 몫인가? 혹여 파악되지 못하거나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 관찰자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 내지 폭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가치혼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나는 예술의 한계없음에 대해 피 토하며 옹호하지만, 한편으로 대중에 대한 정신적인 폭력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