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이혼한 뒤 삶의 무기력에 빠진 철학 교수 마르탱은 어느 날 자동차 안에서 기이한 풍경을 목격한다. 노년에 다다른 한 남자가 어린 소녀를 끌어안고 길을 걷고 있다. 남자는 음탕해 보이고, 소녀는 특별할 것 없다. 그러다 갑자기 소녀가 남자를 밀치며 달아나고, 망연자실한 남자는 술집으로 들어간다. 이 풍경을 흥미롭게 목격하던 마르탱은 소녀가 아니라 남자를 뒤쫓는다. 술집에서 남자를 관찰하던 마르탱은, 남자가 술값이 없어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대신 술값을 내준다. 그러자 남자는 마르탱에게 들고 있던 그림을 주며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라고 말한다. 남자에 대한 이상한 정열에 사로잡힌 마르탱은 다음날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옆집 여자로부터 화가였던 남자가 지난 밤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것도 어느 젊은 여자와의 정사 중에 말이다.

<권태>의 초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르탱이 왜 소녀가 아니라 남자를 쫓아갔을까 하는 것이다. 무엇에 홀린 듯 남자를 쫓아 술집으로 들어간 마르탱은, 마치 노스페라투처럼 죽은 자의 얼굴을 한 남자에게 강렬하게 이끌린다. 그러나 다음날, 사나이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실리아라는 17세 소녀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세실리아는 그 자체로 매혹이 아니라, 어떤 의문의 주석에 불과한 존재였다. 이 보잘것없는 소녀가 어떻게 화가를 죽음의 열정으로 몰아넣었을까? 일상이 권태로운 마르탱은 이 소녀를 경험해 보기로 작정한다.

화가처럼, 세실리아를 집으로 불러들여 정사를 한 마르탱은 무덤덤하게 말한다. “너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넌 평범한 여자야. 아마 좋은 아내가 될 거야.” 지루했단 뜻이다. 그러나 마르탱이 지루한 그녀와 헤어지기로 작정했던 날, 시계처럼 정확한 시간에 그를 방문하곤 했던 세실리아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사라짐, 마르탱은 당황하게 되고, 이내 화가처럼 이상한 정열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사실, 세실리아에 대한 매혹은 그녀의 첫 번째 방문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마르탱의 집에 들어선 세실리아는 곧바로 옷을 벗어던진 후 마르탱에게 섹스를 요구한다. 바로 이 순간, 세실리아는 소녀에서 요부로 변신한다. 낡은 옷 속에 감추어진 그녀의 육체는 고전기 프랑스 회화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듯 풍만하고 육감적이다. 이렇게 풍만한 육체를 가진 팜므 파탈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거의 읽히지 않는 엷은 미소와 함께 마르탱의 표현 그대로 “입보다 풍부한 표정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성기”로 이야기한다. 이 풍만한 육체의 에로티시즘에 마르탱은 중독되고, 이내 파괴적 열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르탱이 그녀에게 사로잡히는 순간, 그녀는 이 관계에 제3의 남자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는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당신이 그와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마르탱은 거의 광분한다. 그러나 정작 마르탱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이중생활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실 그대로의 진술들이다. 그녀는 마르탱의 질문에 모든 것을 말하지만 정작 그녀의 언어적 기의는 텅 비어 있다. 남자를 치명적인 위기로 몰아가는 이 팜므 파탈은 배신과 음모로 위장하는 기호가 아니라 오직 성욕으로 꿈틀대며, 그것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백치의 기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기이한 팜므 파탈에게 매혹되는 이가 비단 마르탱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초반, 노화가의 품에서 거리를 걷던 이 보잘것없던 소녀는(마치 엑스트라처럼 보였던 그녀는) 영화의 진행과 함께 관객에게조차 기묘한 매혹의 대상으로 변신해 간다. 그것은 그녀의 풍만한 육체뿐만 아니라, 그녀의 가는 미소를 머금은 클로즈업들에서 더욱 강렬하게 어필된다. 모라비아의 표현을 빌자면 “이 미소는 어찌나 희미하던지 일부러 미소를 짓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게 만들 정도”이다.

그녀가 기이한 미소로 관객까지 사로잡은 순간, 이제 영화 속 마르탱은 거의 죽음으로까지 치닫는 강한 집착과 광분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철학자인 마르탱은 자신이 신봉하던 이성적 사고를 포기하고 격렬하게 세실리아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이 영화 <권태>에서 드러나는 마르탱의 파괴적 정열은 모라비아가 자신의 소설에서 묘사했던 권태의 반동이라기보다 여성의 육체를 독점하기 위한 남성적 권력과 욕망의 적나라한 전시처럼 보인다. 여성의 육체를 바라보는 남성적 시선과 욕망을 세밀하고도 정치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탁월했던 작가였던 모라비아에게 마르탱의 행위는 그가 직면한 세계적 관계의 권태로움, 즉 무관심과 소외, 그리고 단절을 부정하는 리비도였다. 반면 세드릭 칸에게 그것은 영화적 사건이자 과잉된 욕망에 대한 강박과 집착으로 한정된다.

영화의 후반부, 다른 남자와 여행을 떠나버린 세실리아를 붙잡기 위해 마르탱은 미친 듯이 그녀의 집을 두드린다. 그러나 얼굴을 내미는 것은 흐느끼고 있던 그녀의 엄마이다. “남편은 지금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세실리아는 여행을 떠났어요.”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세실리아의 고백을 들은 바 있던 마르탱은 질문한다.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들려오는 서늘한 대답. “세실리아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세실리아는 사랑하는 주체가 아니라 욕망하는 육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세드릭 칸의 <권태>는 팜므 파탈에 관한한 가장 독특한 묘사이다.

(필름2.0, 영화평론가 정지연)

※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을 촉망받는 신예감독이 감독한 작품이었다. 가장 실험적이고 예술적 성취가 뛰어난 프랑스 영화에 주어지는 ‘루이델뤽상’을 수상했으며, 베니스 영화제에도 초청된 작품이었다. 영화가 수입될 당시 공격적인 노출과 베드씬이 문제되어 수입추천 불허 판정을 받고 국내 상영자체가 불가능했다가, 재심을 통해 NO CUT으로 개봉을 결정되는 등 꾸준한(?) 가쉽거리를 제공해 주었었다. 이 영화를 위해 씨네큐브에서는 별도의 관객대상 작품 해설 강좌까지 열었었다.

이 모든 것도 사실 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었다. 단지 제목이 두 글자라는 것과 프랑스 영화라는 것.. 그리고 가장 강력한 당근이었던 무.삭.제. ← 이 단어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원래 두 글자 제목의 프랑스 영화치고 파격적이지 않았던 영화가 없었다는 나의 20여년에 걸친 영화DB 검색 능력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래서 봤다..ㅎㅎ

하지만 영화를 본 느낌은 뭐랄까.. 한마디로 속았다..ㅎㅎ

누구 말처럼 역사의 변화를 추동한 것은 인간의 진화나 진보, 혹은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의 권태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지루했기에 세계는 진보하고, 과학은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암튼 이 영화에서는 이런 거창한 권태보다는 일상의 권태로움,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섹스를 통해 상실된 인간의 존재성과 공허함을 설명하고 있는 듯 싶었다.

현대적(?) 에로틱함과는 거리가 먼 라파엘로의 The Triumph of Galatea의 Galatea처럼 풍만한(?) 몸집을 소유하고, 알듯말듯 당췌 그 속을 알수 없는 미소를 지닌 여배우와 반쯤 벗겨진 대머리, 신경과민에다 염세적인 성격, 그리고 속사포같은 언어구사와 짜증스러울 만큼 집요하면서 집착스러운 남자배우의 이 권태스러운 사랑이야기는 인감심리 묘사에 탁월한 프랑스 영화답게 세밀한 영화적 장치를 통해 노련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권태는 훌륭한 원작아래 그 영화적 완성도나 존재론적 공허감을 잘 나타내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지극히 권태(?)로운 영화였다.

작품성 : ★★★

오락성 : ☆